제3회 기획취재공모전 최우수상작
[K-구혈기(求血記)]
② 서바이벌게임 된 지정헌혈
편집자주
한국일보 제3회 기획취재 공모전에 당선된 최우수상 1편과 우수상 2편을 게재합니다. 이번 주는 최우수상을 수상한 'K-구혈기(求血記)'로 심각한 혈액난의 현실과 부족한 정부 대응을 조명합니다.
피는 내 맘대로 사고팔 수 없다. 개정혈액관리법 시행령이 발효된 1981년 7월 1일부터다. 대한적십자사는 한정된 피 자원을 분배할 권한을 갖게 됐다. 권한이 큰 만큼 책임을 피해 갈 수는 없다.
공공보건의료법은 국가가 국민의 보건의료 수요를 ‘형평성’ 있게 충족해줘야 한다고 규정한다. 누구나 차별 없이 수혈받을 수 있어야 하는 이유다.
지정헌혈은 이 형평성을 해친다. 환자의 사연이 절절하거나 가까운 지인이 많다면 피를 구하기 쉽다. 그러나 두 사항에 모두 해당하지 않는다면 피 구하기는 훨씬 어려워진다. 이에 환자마다 수혈 실적에 차이가 생긴다. ‘수혈의 공정’이 위협받고 있다.
이렇게 수혈 격차를 부추기는 지정헌혈을 찾는 사람들이 폭증하고 있다. 지정헌혈 요청 플랫폼 ‘피플’ 김범준 대표는 "처음 서비스를 시작했던 2019년도에는 요청 글이 한 달에 10건 남짓 올라왔는데, 지난해에는 한 달 동안 10배나 많은 110건이 올라왔다"고 밝혔다. '지정헌혈' 앱을 개발한 서난희씨는 "하루에만 글이 평균 30~40건 올라온다"고 했다. 앱을 찾아 올리는 지정헌혈 요청 글이 한 달 기준 1,000개에 육박하는 셈이다.
절절한 사연과 인맥왕에 몰리는 혈액
“지정헌혈로 당신이 ‘직접 선택’한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해보십시오.” 지정헌혈 앱에 적힌 홍보 문구다.
지정헌혈이 필요한 환자는 말 그대로 ‘선택’받아야 한다. 지정헌혈은 일반헌혈과 달리 헌혈자가 수혈자를 직접 고르는 시스템이다. 때문에 헌혈자들은 수요자들의 처지를 비교하게 된다. 상황이 아주 불행하거나 위급해 동정심을 자극하는 사연일수록 ‘잘 팔린다’.
아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좋은 '셀링 포인트'다. 김지훈(2·가명)군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급성골수성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한 달에 20번 이상 몸에 대바늘을 꽂았다. 혈소판 수치를 유지하려면 앞으로도 수혈이 계속 필요하다.
지훈이 아버지는 지정헌혈을 구하기 어렵냐는 질문에 “솔직히 아들의 사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정심을 표한다”며 “다른 사람들보다는 지정헌혈자를 구하기 쉬운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어 “처음에 지훈이의 사연을 인터넷에 올렸을 때 지정헌혈을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몰려 애를 먹었을 정도”라고 했다.
각종 커뮤니티와 플랫폼에서 수혈자들이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처럼 적나라한 표현을 쓰는 이유다. 김진표 긴급헌혈봉사단 대표는 “사연을 잘 적은 분들한테는 혈액이 집중되고 아닌 분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며 “어찌 보면 수급의 불균형이 벌어지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명인이면 지정헌혈 받기는 더 수월해진다.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이 지정헌혈을 요청하면 언론에 보도되고, 팬덤이 움직인다. 지난달 31일 tvN 드라마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제작진들에게 교통사고가 발생하자, 배우 김향기와 김민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정헌혈 요청 글을 올린 것이 대표적이다. 배우 김민재는 하루 만에 “긴급 수혈을 위한 혈액을 구했다”고 글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연예인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지정헌혈 요청 글을 공유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지난 4월 배우 겸 가수인 엄정화는 한 누리꾼으로부터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있는데 제힘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며 “지정헌혈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받아 이를 자신의 SNS에 공개했다.
지인 없어 난감…간호사가 무연고자 대신 구하기도
반면 지인이 적으면 피를 구하기 녹록지 않다. 출산을 앞둔 이진아(36)씨는 태국에 거주 중인 외국인 남편을 두고 혼자 한국에 왔다. 그러다 출산 2주 전 담당 의사에게 주변에 O형이 있으면 피를 구해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이씨는 "직계 가족에겐 수혈을 받을 수 없어 깜짝 놀랐다”며 “외국에서 살다가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돼서 주변에 아무리 물어봐도 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임산부들이 모여 있는 오픈채팅방에서 지정헌혈 앱을 알게 되어 겨우 헌혈자를 구했다.
지정헌혈을 요청하는 글조차 쉽게 못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인터넷 사용이 어려운 고령층이나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외국인, 무연고자는 병원에 오롯이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3월 지정헌혈 앱에는 ‘중환자실에 입원한 무연고 환자에게 수혈이 필요하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 작성자는 국제성모병원 코로나병동 간호사였다. 병원 혈액은행 관계자는 "무연고자 환자의 사정을 안 의료진들이 글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한 종합병원 간호사는 “확실히 가족들이 나서주는 환자가 원활하게 구해온다”고 말했다.
”지인에게는 이미 죄인”
백혈병 환자와 같이 지속적인 수혈이 필요한 환자들은 지정헌혈 구하기가 더 부담스럽다. 정주원(41)씨는 골수 이상으로 혈소판이 줄어드는 병(골수형성이상증후군)을 앓고 있어 꾸준한 수혈이 필요하다. 정씨는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는데 헌혈해주겠다던 사람들도 코로나19 확진으로 못 해줬다”며 “결국 지인들에게 다시 연락했다”고 말했다.
정씨의 경우 혈소판 헌혈이 필요한데, 혈소판은 유통기한이 짧아 헌혈을 한꺼번에 몰아서 부탁할 수도 없다. 정씨는 “지인들에게 계속 부탁하기도 눈치 보인다”며 “지인들한테 부탁 안 해도 되는 상황만 돼도 좋겠다”고 덧붙였다.
개인정보 노출에 매혈까지, 지정헌혈 무법지대
피 구하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지정헌혈 요청자들은 개인정보 노출까지 감수한다. 환자들은 인터넷 카페, 블로그, 앱에 본인의 이름이나 핸드폰 번호가 공개된 글을 올린다. 헌혈자를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면 최대한 많은 사람과 연락이 닿아야 하기 때문이다. 추후 글을 지운다고 하더라도 이미 공개된 신상 정보는 되돌릴 수 없다.
개인정보 노출은 각종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백혈병을 앓고 있어 지정헌혈을 구하고 있는 김유민(29·가명)씨는 “신상 정보를 공개해야 해서 글을 올리기 꺼려졌다”면서도 “인터넷에 글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법으로 금지된 매혈도 ‘지정헌혈 사례해 드린다’는 명목으로 현재 진행 중이다. 중고나라, 당근마켓 등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헌혈자에게 작은 사례라도 하겠다”는 지정헌혈 요청 글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금액도 5만 원에서 20만 원까지 구체적이다.
‘매혈’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지 않았을 뿐 엄연한 매혈 행위로 불법이다. 혈액관리법 제3조에 따르면 누구든지 금전, 재산상의 이익을 받기로 하고 자신의 혈액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위반 시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한 대학병원 간호사는 "지정헌혈을 받아 온 환자 중에 헌혈자에게 사례를 했다고 말한 환자와 가족들이 있었다"며 "이게 매혈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이 여유가 있는 사람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글 싣는 순서
① 혈액대란에 우는 환자들
② 서바이벌게임 된 지정헌혈
③ 미봉의 연속, 헌혈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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