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이탈리아 수도사 겸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가 1498년 5월 23일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십자가 화형으로 숨졌다. 이단과 종파주의, 신성모독 혐의였고, 권력자는 바티칸 교황청과 피렌체 메디치 가문이었다.
귀족가에서 태어나 인문학과 의학을 공부한 그는 도미니코수도회에 입문, 금욕의 설교자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종교개혁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만성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1517년 10월)을 붙이기 훨씬 전부터 역대 최악의 교황으로 지탄받는 알렉산데르 6세(1492~1503 재임)의 축첩 호색 탐욕과 교회의 타락을 성토했고, 자신을 산마르코 수도원장으로 추대한 메디치 일가(당시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해서도 도시를 향락과 타락으로 이끌고 있다고 서슴없이 비판했다. 신의 계시를 빌어, 교회와 메디치 가문에 대한 '신의 칼(la Spada di Dio)'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했던 그의 설교에 메디치의 하층민들이 열렬히 호응했다.
1494년 9월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이, 당시 시민들에겐 계시의 실현, 즉 신의 심판이었다. 사보나롤라는 샤를 8세에게 협력을 약속하며 시민들에 대한 약탈을 저지시켰고, 그 활약으로 피렌체의 새 지도자가 된 뒤 도색잡지와 귀금속 등 도시의 모든 사치·향락품을 광장에 쌓아놓고 '허영의 화형식'을 거행했다. 불탄 작품 중에는 르네상스 거장들의 회화 작품도 다수 포함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과격한 금욕주의에 시민들은 이내 피로감을 느꼈고, 교황 중심의 반프랑스 동맹이 1495년 다시 이탈리아를 장악하면서 그는 실권, 교황의 '회개' 제안을 거부한 채 처형됐다.
당대 피렌체 사상가 마키아벨리가 1513년 발표한 '군주론'은 권좌에 복귀한 메디치가에 바친 책이다. 그 책에서 그는, 학자적 양심 때문인지 주제에 집중하려던 의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사보나롤라의 몰락을, 지향의 옳고 그름에 대한 언급 없이, 무력의 결핍 때문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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