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늦게 이곳 스페인 산티아고대성당 앞 광장에선 작은 축제가 열렸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걷기를 마친 기쁨과 안도감을 와인이나 맥주로 만끽한 '2022년판 순례객' 수백 명이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스페인 전통음악에 맞춰 춤추고 노래했다. 걷기 일정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내기 서운했던 우리 일행 몇 명도 대부분 스페인 사람인 축제객과 어울렸다.
짧은 소나기가 지나가고, 유난히 밝은 달 아래 웅장하게 서 있는 산티아고대성당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울컥하고 눈물을 쏟았다. 슬픔의 눈물, 고통의 눈물은 아니었다. 그냥, 그냥 터져 나온 눈물이었다.
한국에서 걷기 여정의 출발점인 팜플로나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28시간. 버스로만 이동한 하루를 빼고 열흘간 걸어온 공식 거리는 169㎞지만 휴대폰에 찍힌 기록은 226㎞, 30만5,644걸음이었다. 운무와 가랑비 속에 해발 1,400m의 피레네산맥의 급경사 돌길을 내려오다가 걷기 첫날부터 양쪽 새끼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걷는 동안 끊임없이 내게 물었다. 나는 왜 이 길을 걷는가? 길은 해답을 곧바로 주지 않았다. 그저 내 안에 해답이 있다는 걸 자연스레 알려주었을 뿐이다. 어느 성당에서 무심코 뽑은 '말씀 쪽지'(마태오복음 11장28절)가 그것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난 10여 년간 나는 아프고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쉼과 행복과 건강을 주는 사람이라고, 화수분처럼 에너지가 샘솟는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그 일을 너무나 잘 해내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사실은 나도 힘들고 지쳐가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스페인의 산과 들을 걸으며 '숨통이 트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온 몸으로 느꼈다. 숨막히는 일상에 갇혀 전력을 다해 살아 내고 있는 내 자신에게 위로와 쉼을 좀 더 많이 주라고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은 내게 말해주었다. 길은 하나지만 그 길이 전해준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똑같지 않다. 함께 길을 걸은 다른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몸과 마음의 물음에 답을 찾다."(코칭회사 대표코치)
"우리는 길이 아니라 길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배운다."(자발적 백수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는 50대)
"이 길을 걸으면서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고, 서울에서는 답답하고 끝이 안 보이던 생각들이 차분히 정리되니 제 인생에서 가장 의미 깊었던 여행인 것 같아요."(재수를 결심한 20대 아들)
"무엇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을까, 해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아들과 함께 걷기 위해 특별휴가를 낸 아빠)
"이 또한 지나가리라!"(연구년 중 버킷리스트를 이룬 교수)
"내 안에는 내가 아는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나도 있음을 산티아고길 위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할 길 가운데 멈춰 '용서의 능력'을 빌었습니다. '용서'는 감히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이 허락하셔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용서 못 하는 나, 용서받지 못하는 나. 나는 과연 이들을 이곳에 두고 갈 수 있을까요?"(마음치유 전문가)
-5월 15일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옛 수도원 숙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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