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헌트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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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갈등을 넘어 존중과 공존을 말하는 시대가 됐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모색한다, 공존’은 다름에 대한 격려의 길잡이가 돼 줄 책을 소개합니다.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재임 당시 '대통령 할아버지'로 불렸다. 해마다 치러진 이승만 생일 기념 문예전에서는 대통령 할아버지에게 사진을 요청한 어린이도 많았다.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기사에서도 "할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세요"라며 환송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승만은 독재자인 동시에 친근한 할아버지였던 셈이다. 대통령을 '우리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가족화된 상상력은 4·19 이후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계속된다. 이승만뿐 아니라 대통령은 곧잘 가부장에 비유된다. 왜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뽑은 대통령을 향해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같은 칭호를 쓸까.
근대 국가의 모델인 프랑스 혁명은 신분제를 타파하고 평등한 시민들의 공화국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3대 정신이 이를 대표한다. 그런데 역사학자인 린 헌트는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새물결 발행)에서 국민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남성이 아닌 자들은 배제됐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의 '아버지 살해' 개념을 프랑스 혁명에 적용한 그는 프랑스 혁명이 시원적 아버지를 죽이고 형제애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있던 원시시대는 아들들의 아버지 살해로 인해 해체된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들은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탄생시키고, 이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상호 의무를 인식하고, 사회제도를 제정한다. 이 형제 동맹은 남성적 사회구조를 분석하는 데 유효한 틀을 제공했다. 헌트는 혁명을 계기로 국왕이라는 정치적 아버지는 살해됐고, 평범한 아버지들은 법률의 제약에 굴복하거나 국가의 권위에 의해 대체됐다면서, 아버지를 죽인 아들들 간의 형제애에 기반해 시민이 탄생한다고 설명한다. 입법의회는 가부장의 특권을 분해하여, 그것을 개인 간 그리고 개인과 국가 간 계약관계로 확립시켰다. 그러나 이때 개인은 남성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사회계약의 토대가 된 형제들 간의 계약은 가부장제를 남성들의 정치적 권력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박애란 글자 그대로 사실상 남성들 사이의 형제애(fraternity)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린 헌트의 주장이다. 여성이나 흑인은 그 주체가 될 수 없었다.
헌트의 이러한 분석은 정치학자 캐롤 페이트먼에 기대고 있다. 페이트먼은 '남성'으로서의 인간, 형제로서의 인간에 여성이 복종하게 된 것이 근대 시민사회의 결정적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여자들의 무질서'(도서출판비 발행)에서 형제애적 사회계약을 비판하면서 가부장제와 장자 상속의 정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름으로 제도화됐다고 지적한다. 가부장제 복지국가는 여자를 사적 영역으로 몰아내고, 시민권 바깥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심판론으로 20대 대통령에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은 첫 내각을 명문대를 나온 60대 남성들로 꾸렸다. 차관은 두 명을 제외하고 전원 남성이다. '형님 리더십' 운운하는 언론의 분석은 과언이 아니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이 형제들의 정치는 자유, 평등, 박애가 남성 형제들에게만 허락된 프랑스 혁명의 배면과 똑 닮았다. 김성회 전 종교다문화비서관은 동성애를 질병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보상 문제를 '화대'로 지칭했던 것이 파문을 일으켜 사퇴했다. 윤재순 총무비서관은 2002년 발표한 시에서 지하철을 "사내아이들의 자유가 보장된 곳"으로 명명하며 성추행을 낭만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검찰 재직 시 성 비위로 징계받은 바 있다. 김인철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자녀에게 특혜를 줬다는 의혹과 더불어 '방석집'에서 박사논문 심사를 진행했던 것이 알려져 자진 사퇴했다. 지하철에서, 방석집에서 그들은 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운영하고 있다.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두 활동가가 단식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다.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는 곳에 있는 그들을 국회는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하면서 자유와 공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형제들이 세운 나라에는 여자들이, 성소수자들이, 장애인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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