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와인, 미국을 만든 101가지 물건
스미스소니언 미국역사박물관에는 ‘미국을 만든 101가지 물건’이 있다. 목록에는 나파밸리의 와인 2종도 올라 있다. 샤토 몬텔레나 1973과 스택스 립 와인 셀라 1973이다. 프랑스도 아니고 ‘미국’을 만든 물건에 와인이 포함되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두 와인이 영광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 까닭은 소위 ‘파리의 심판(The Judgment of Paris)’으로 알려진 1976년 5월 24일의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와인 종주국’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대부분 주저하지 않고 프랑스를 든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종주국’이라고 해서 영원히 최고라는 법은 없다. 축구에 진심인 잉글랜드처럼 말이다. 세계 곳곳에는 숨은 실력자가 많으니, 다크호스는 때를 만나 등장하기 마련이다. 20세기 후반 들어 와인 세계에도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으니, 바로 미국이었다.
스티븐 스퍼리어라는 영국인이 있었다. 그는 1976년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와인 교육 아카데미와 와인 가게(Cave de la Madeleine)를 운영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는 미국인 동료 패트리샤 갤러거와 함께 여러 와인을 찾아 시음했다. 그러다 미국 와인이 생각보다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그 와인(항아리형 큰 병에 담긴 저가 와인)이나 생산하는 줄 알았던 캘리포니아에서 와인 산업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참이었다.
프랑스 고급 와인·미국 캘리포니아 와인 블라인드 시음해 보니
그들은 사업체를 홍보할 만한 재밌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프랑스 고급 와인과 캘리포니아 와인을 ‘블라인드로 비교 시음(blind tasting)’하는 행사였다. 마침 1976년은 미국 건국 200주년이니 행사를 통해 프랑스 와인의 우수성에 힘입어 캘리포니아 와인을 소개하기에 좋았다.
갤러거와 스퍼리어는 시차를 두고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여러 와인을 맛보면서 시음대에 올릴 와인을 찾아다녔다. 되도록 숨은 보석과 같은 와인을 물색한 끝에 레드와인 6종과 화이트와인 6종을 골랐다.
갤러거는 프랑스 와이너리 투어를 이끄는 친구에게 와인 운반을 부탁했다. 당시 단체 여행객은 32명이었다. 그런데 준비한 와인은 총 36병이었다. 프랑스 세관에서는 한 사람당 와인 한 병만 허용했다. 다행히 행운이 따랐던지 무사히 통과됐다(1병이 깨져 35병이 통과됐다).
행사는 파리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렸다. 심사위원은 총 11명이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프랑스 와인 업계의 거물들로, DRC(Domaine de la Romanée-Conti) 공동 소유주, 프랑스원산지명칭통제위원회(AOC) 총감독, 보르도 1855그랑크뤼클라세협회 사무총장, 타이유방, 투르 다르장, 르 그랑 베푸르 등 미슐랭 3스타 오너와 셰프와 소믈리에, ‘프랑스 와인 리뷰’ 편집장, ‘고미요’ 영업이사(유일한 비전문가), 아카데미 뒤 뱅의 와인 교육 담당 등이었다. 행사 주관자인 스퍼리어와 갤러거도 이들과 함께 심사했다.
테이스팅은 화이트와인부터 레드와인 순으로 진행됐다. 먼저 화이트와인에는 캘리포니아 와인 6종에 프랑스 부르고뉴 고급 와인 4종(바타르 몽라셰, 뫼르소 샤름, 퓔리니 몽라셰 레 퓌셀, 본 클로 데 무슈)이 등장했다.
와인은 원래의 병이 아닌 다른 병에 담겨 있었다. 완벽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위한 조치였다. 이윽고 와인이 심사위원들에게 서빙됐다. 향긋한 와인 향이 행사장에 서서히 퍼지는 순간에도 아무도 몰랐다. 새 역사의 서막이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스퍼리어는 시음이 모두 끝나고 결과를 발표하려고 했다. 그런데, 장소를 대여한 시간에 쫓겨 화이트와인 시음 결과를 먼저 발표했다.
1위는 샤토 몬텔레나(Château Montelena 1973). 캘리포니아 와인이었다. 3위와 4위 역시 캘리포니아 와인이었다. 프랑스 와인은 룰로(Roulot)가 만든 뫼르소 샤름(Meursault Charmes 1973)만 2위였고, 나머지는 하위로 밀렸다.
"이제야 프랑스로 돌아왔어" 알고보니 미국 와인
순식간에 행사장은 ‘찬 와인’을 끼얹은 듯했다. 프랑스인 심사위원들은 아연실색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실상은 이랬다. 한 심사위원이 부르고뉴 그랑크뤼 와인 바타르 몽라셰를 시음할 때였다. “이건 캘리포니아 와인이 확실해. 좋은 향이 전혀 없어.” 다른 부르고뉴 와인을 마실 때도 심사위원들은 한마디씩 했다. “까칠하지만 그나마 괜찮군.” “향은 좋은데 맛이 덜해.” 이윽고 캘리포니아 와인을 맛볼 때였다. 어느 심사위원이 만족한 듯 읊조렸다. “이제야 프랑스로 돌아왔어.”
예상치 못한 결과에 행사를 기획한 스퍼리어도 당황했다. 점수표를 보니 더 가관이었다. 프랑스 와인 업계 거물 심사위원 9명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스퍼리어와 갤러거가 매긴 점수는 합산하지 않았다).
곧이어 레드와인 테이스팅이 이어졌다. 호되게 당한 심사위원들은 맛에는 흥미가 없는 듯 보였다. 이들은 오로지 프랑스 와인을 찾기 위해 집중할 뿐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프랑스 와인에는 높은 점수를, 캘리포니아 와인에는 낮은 점수를 매겼다.
레드와인 심사 결과가 나왔다. 1등은 스택스 립 와인 셀라(Stag's Leap Wine Cellas 1973)였다. 역시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이었다. 저 유명한 보르도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와 샤토 오브리옹, 샤토 레오빌 라스 카스, 샤토 몽로즈를 제치고, 목록 맨 위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의 ‘골짜기’ 와인이 프랑스 ‘성(샤토)’벽에 깊은 상처를 낸 순간이었다.
타임 장식한 ‘파리의 심판’
이날의 이야기는 2주 뒤인 6월 7일, 미국 시사지 타임에 ‘파리의 심판’이란 제목으로 기사화됐다. 프랑스 일간인 르 몽드와 르 피가로의 기자는 초청을 받았지만 결과가 너무 뻔한 행사라 심드렁했다. 행사에 참석한 기자는 타임의 파리 특파원 조지 M. 태버뿐이었다.
사실 그 역시 행사 소식을 듣고는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와인의 승리가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행사장에서 와인이나 마시며 지루한 오후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기자답게 심사위원들의 말과 태도를 샅샅이 취재해 전했다.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캘리포니아가 골(Gaule, 프랑스의 옛 이름)을 이겼다.”
조지 태버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기사 제목은 사람들에게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파리의 심판’을 연상시켰다. 그는 그날의 이야기를 훗날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그 책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프랑스 와인 리뷰’와 ‘프랑스 음식과 와인’의 편집장인 오데트 칸은 자신의 평가표(가장 높은 점수를 준 2개가 캘리포니아 와인이었다)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경합 자체가 잘못되었다. 캘리포니아 와인은 프랑스 와인을 모방해 만든 와인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몇몇 심사위원들도 “테이스팅 순서에 문제가 있었다”거나 “프랑스 고급 와인은 숙성해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둥 뒤끝을 보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캘리포니아 와인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대체로 인정했다. 다만 프랑스 와인을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고도 했다.
과연 숙성이 문제였을까. 10년이 지나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또 열렸다. 이번에는 장기 숙성에 맞지 않는 화이트와인은 제외하고 레드와인만을 시음대에 올렸다.
스퍼리어의 도움으로 뉴욕의 프랑스 요리학교(FCI)가 주최한 테이스팅에서는 클로 뒤 발(1972)이 1위에 올랐다. 미국 와인이었다. 와인스펙테이터가 주최한 테이스팅에서도 미국 와인 하이츠 와인 셀라 마르타스 빈야드(1970)가 1위였다. 게다가 2위에서 5위까지도 모두 미국 와인이었다.
'30년 후 재대결' 프랑스 와인의 굴욕
이게 끝이 아니었다. 파리의 심판 30주년을 맞아 2006년 재대결이 또 한 차례 열렸다. 30년 전과 동일한 와인으로 런던과 미국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1976년에는 레드와인 1위가 캘리포니아 와인, 2~4위와 6위는 프랑스 와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위(Ridge Montebello Vineyard 1971)부터 5위까지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이 차지했다.
어게인 1976. 결과는 30년 전보다 비참했다. 프랑스 와인의 대굴욕이었다.
앞서 오데트 칸이 늘어놓은 ‘푸념’처럼, 사실 1970년대 캘리포니아의 고급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 와인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그들의 목표는 프랑스 와인 스타일에 최대한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든 창조의 어머니는 모방 아니던가.
캘리포니아 와인은 포도 재배에 적합한 테루아르(기후와 토양 등), 과학적 양조 기술, 자본력, 넓은 시장 등을 갖춘 환경에서 관습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와인을 자유롭게 빚어냈다. 명품을 모방할 수 있는 정교한 기술에 창의성까지 더한 셈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때는 프랑스 와인이라는 거인의 어깨를 빌렸지만, 오늘날 캘리포니아 와인은 자신의 ‘어깨’를 내어줄 만큼 성장했다.
프랑스와 미국 와인메이커들의 동행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파리의 심판은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신세계의 와인 메이커들에게 자신감을 줬다. 프랑스 와인 업계도 콧대를 낮추고 신세계의 과학적 양조 방식과 합리적 경영 방식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의 심판 당시 1위를 나파밸리 와인에 내준 보르도의 샤토 무통 로칠드는 3년 뒤인 1979년, 캘리포니아의 로버트 몬다비와 합작해 ‘오퍼스 원’이라는 명작 와인을 만들었다.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구세계 와인 메이커들은 후발로 시작한 신세계 생산자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파리의 심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와인 역사의 분기점이자 와인 세계의 민주화의 시작이었다.” 맞다. 지구는 둥글지만, 세상은 평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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