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고충처리)위원회가 열려서 까발려지면 참 볼썽사납거든. 요즘 회사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구설에 오르는 것 자체로도 절대 좋게 안 끝나. A팀장도 (고충)신고를 한 거 알지? (가해자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신고를) 취하하는 게 어떨까? 인생 선배로서 하는 말인데 결국 용서하고 이해하는 게 마음이 편해. 강요는 아니야. 다른 데 가서 절대 내가 이런 말 했다고 하지 말고."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사실, 상사에게 유출
부서 이동 후 9개월간 A팀장의 괴롭힘을 참아 왔습니다. 결국 지난해 12월 담당 부서에 구두로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의사를 밝혔고, 올해 1월 신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로부터 3주 후, A팀장의 상사인 B본부장이 저를 호출하더니 신고 취하를 종용했습니다. 그는 A팀장이 담당 부서로부터 신고 사실을 전해 듣고 저에 대한 고충신고서를 제출했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중앙부처 산하 박물관에 다니고 있습니다. 사실 A팀장을 신고하기까지 수백 번은 더 고민했습니다. 취업 준비 2년 만에 어렵게 입사한 직장인 데다가, 박물관 업계는 워낙 좁다 보니 소문이 빨리 도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신고를 결심한 것은 "내가 살려면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사무실에 있다가 갑자기 열이 치솟고 숨이 쉬어지지 않아 응급실에 갔었거든요.
결국 신고는 취소했습니다. 당시 직장에선 성추행과 괴롭힘 사건이 잇따랐습니다. 그런 와중에 인사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본부장이 문제 제기하면 다칠 수 있다고 경고를 하니, 어렵게 발을 들인 직장에서 또 업계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신고 취하했지만 2차 가해 시달려
하지만 신고 내용이 이미 퍼졌고 2차 가해가 시작됐습니다. 가해자와의 분리를 요청했지만, 담당 부서는 "피해자 말만 듣고 A팀장에게 재택근무나 휴가를 명령할 수는 없다"며 즉각 조치하지 않았습니다. A팀장의 뾰족한 태도를 감당하는 일은 오롯이 제 몫으로 남았습니다.
몸은 이상 반응을 보이는데 여전히 결재권자인 A팀장은 병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고열과 호흡곤란을 겪었던 터라 신경정신과와 심뇌혈관센터 진료를 받아볼 요량으로 하루 병가를 신청하자, A팀장은 다른 팀원 앞에서 제 이전 진료 내역을 언급하면서 "병가는 질병으로 일을 못 할 정도일 때 쓰는 것인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며 반려했습니다. 연차를 쓰겠다고 하자, A팀장은 제가 어느 병원에 갈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점을 문제 삼으면서 "마음대로 하고 감사를 받으라"고 답했습니다. 결국 연차도 쓸 수 없었습니다.
분리 요청이 뒤늦게 받아들여져 저는 다른 팀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인사 이동 당일 일과가 시작되기 전, A팀장은 카톡 팀 대화방에 "내가 없는 시간대에 짐을 다 빼라"고 제게 요구했습니다. 출근해서 짐 정리를 하고 있는데 다른 직원들이 다 보고 있는 가운데 "이소정씨, 사무실에서 당장 나가세요"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후에도 회계부서에서 이미 승인한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문제 삼으며 "감사받도록 하겠다"고 겁박하기도 했습니다.
팀 이동했지만 계속 마주쳐야
팀은 바뀌었지만 아직도 A팀장과 회의에서 마주쳐야 합니다. 그때마다 괴로웠던 경험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A팀장은 조용한 사무실에서 갑자기 화를 내거나 물건을 내리치며 팀원들에게 "야 ㅇㅇㅇ!"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A팀장이 언제 무슨 이유로 소리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 때마다 심장이 뛰고 목이 조이는 듯합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른 재택근무 권고에도 "우리 팀원들은 출근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며 재택근무를 어렵게 하거나, 금요일엔 연차를 쓰지 말라고 제한하기도 했습니다.
저에 대한 공격적 언사도 기억납니다. A팀장으로부터 "네가 그렇게 이상하니까 이 부서에 보낸 것 아니냐" "업무 능력이 ㅇㅇㅇ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점심을 자주 건너뛰는 제게 "나는 식사를 잘하는 사람이 좋은데 이소정 선생님은 밥을 잘 안 먹어서 싫다"고도 했습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도 메시지에 답하지 않으면 이유를 추궁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토요일 행사가 있는 경우엔 행사 준비를 모두 마쳤다고 해도 금요일 대휴 요청을 거부하기 일쑤였습니다.
A팀장을 가해자로 지목한 직원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C씨는 지난 1월 A팀장의 괴롭힘을 사직 이유로 밝히고 퇴사했습니다. D씨 역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저 또한 병원에서 "반 년 정도 더 약을 먹으며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는 말을 듣는 상태입니다. 잊고 싶은 이야기를 다시 용기를 내서 꺼낸 것은 어떤 형태로든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면 비슷한 피해가 반복될 거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소정씨(가명)
고충신고 사실 유출은 형사처벌 대상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조치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76조의 2, 3항은 신고 내용을 조사하거나 보고받은 사람이 피해자 의사에 반해 조사 내용을 누설해선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해당 기관에서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사안을 보고받을 위치에 있지 않은 B본부장이 소정씨의 신고 사실과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담당 부서의 불법 누설 가능성을 의심하게 합니다. B본부장이 소정씨에게 신고 취소를 종용한 것은 해당 법조항이 금지하고 있는 피해 근로자에 대한 '불리한 처우'에 해당합니다.
근로기준법엔 회사가 직장 내 괴롭힘을 인지한 즉시 피해자 보호 조치를 하도록 규정돼 있습니다. 공공부문 직장갑질 종합 매뉴얼에 따르면, 법 조문상 '인지한 즉시'는 신고 접수가 없었더라도 피해자 면담 요청 등을 통해 회사가 사건을 인지한 직후를 뜻합니다. 하지만 소정씨는 피해 신고를 하고도 한 달이 넘도록 피신고자와 같은 팀에서 일해야 했고 조사위원회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소정씨 소속 기관은 법에 명시된 직장 내 괴롭힘 신고 후 처리 절차를 위반한 셈입니다.
특히 같은 피신고자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호소한 사례(C씨)가 있는데도 기관에서 적절한 사후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가해자에게 "부하 직원을 괴롭혀도 괜찮구나"라는 그릇된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팀장은 소정씨의 신고 사실을 숨기긴커녕 모두가 알도록 했고, 소정씨에게 대놓고 고함을 치기도 했습니다.
A팀장의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볼 여지가 큰 것은 물론입니다. 권남표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소리를 지르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관계의 우위를 앞세워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라며 "단순히 업무와 관련한 지적이라면 소리칠 필요 없이 명확히 고지를 하면 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A팀장이 부하 직원의 연차 사용을 막은 점도 문제입니다. 권남표 노무사는 "사업에 막대한 지장이 예상되는 경우에 한해선 휴가 제한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다음날 행사가 있다는 것만으로 휴가를 못 쓰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회사, 알고도 대처 안 한 정황
소정씨 사례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C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C씨는 A팀장의 괴롭힘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지만 5개월이 지나도록 그때 일이 생각나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C씨가 썼던 사직서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사직하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한 노동 전문 변호사는 "비자발적 퇴사자에게 주어지는 실업급여를 C씨가 받고 있는 점 등에 비춰볼 때 회사가 A팀장 문제를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소정씨가 취할 수 있는 조치로 고용노동청 신고를 권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진료 내역, 녹취, 메시지 등이 피해를 입증할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근로기준법 116조에 따르면, 해당 기관이 직장 내 괴롭힘 조사 및 피해자 보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판명될 경우 기관은 500만 원 이하 과태료를 물게 됩니다. A팀장과 B본부장은 피해 사실 신고 및 주장에 불이익을 준 사실이 인정된다면 근로기준법 109조에 따라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부당한 연차 사용 제한은 근로기준법 60조 위반으로,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 부과 대상입니다.
공공기관은 일반 회사보다도 엄격한 준법성과 공정성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언론에 보도되거나 국민신문고를 통해 알려진 직장 내 괴롭힘 사례를 분석한 결과, 괴롭힘 피해로 극단적 선택을 한 직장인 19명 가운데 10명이 시청, 소방서 등 공공기관 근무자였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공공 부문이 선진 직장문화 조성에 앞장서 소정씨의 용기에 부응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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