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긴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20> 경남 창녕군 고분공원
인류문명사에 도시를 세계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세계 4대 문명의 고대도시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스에서 코즈모폴리턴이라는 철학이 생겨난 것이 바로 도시를 뛰어넘는 세상을 꿈꾸던 시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흔적들을 고대기록과 유적에서 볼 수 있다. 역사서 속에 마한과 진한, 변한의 국(國)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이다. 변한을 이어받은 가야의 나라들은 도시국가적인 모습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래서 무덤 속에 남아 있는 화려한 유물과는 별개로 가야라고 하면 아쉬움이 남는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창녕, 비화가야의 땅이다. 가야제국의 맹주 역할은 아니었지만, 낙동강이 너른 들을 만든 곳이어서 이름 그대로 풍요로운 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화가야의 고분발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송현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 소녀의 인골이 발굴된 것이다. 한반도의 발굴사에서 무덤 속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래서 창녕 시내 교동과 송현동의 고분들에 발길이 끌리고,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서 보듯 고대 계급사회 슬픈 이야기의 현장에서 역사를 곱씹어 보게 된다.
창녕, 풍요로운 역사도시
창녕(昌寧), 한없이 편안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원래 지명은 중국 사서에는 불사국(不斯國), 삼국사기에는 비사벌(比斯伐), 즉 ‘빛이 좋은 벌판‘으로 알려진다. 벌이라는 음에서 불(火)이 되어 비화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창녕은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도시인데, 하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돼 김해로 흘러가는 내륙수운교통의 요충이다. 낮은 땅에는 소벌, 또는 우포(牛浦)늪과 같은 습지가 발달됐는데 그만큼 자원이 풍족했을 것이다. 곳곳에는 고인돌과 고분, 절터와 충신과 학자들의 사당, 성터들이 있어 고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구부터는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서대구에서 반 시간 남짓이면 창녕에 도착한다. 고속도로를 나와 동편에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를 타면 시가지가 거의 끝날 즈음 창녕의 주산인 화왕산(火旺山)에서 내려오는 구릉을 따라 고분들이 보인다. 이들이 바로 비화가야의 주인공들이 묻혀 있는 국가사적인 교동과 송현동의 고분군이다. 능선에 조성된 공원에는 말끔히 정리된 고분들이 우아한 반구(半球)의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 앞에 선 박물관에서 비화가야 고분의 비밀뿐 아니라 창녕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비화가야
삼국유사에서 김해 구지봉 신화 속에 나오는 6개 알 중의 하나가 비화가야(比火伽倻)의 시조다. 변한의 12국을 가야라고 보아 12국이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처럼 크지는 않아도 6국 중에 하나라는 것은 그만큼 큰 나라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 고대사에서 삼국으로 정립되는 과정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뤄졌고, 가야의 나라들도 1세기 중반에 출현해 6세기 중반까지 지속됐으니 500년의 긴 역사가 있다.
교동 고분에서 출토된 칼의 명문으로 미루어 비화가야는 5세기 후반까지는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이 하주(下州)를 설치하고 척경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일찍이 신라의 영역권에 들었고, 실제로 출(出)자형 금동관 등 이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신라의 강한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 고분에서 나온 갑주나 마구, 칼 등의 무구들에 격렬한 전쟁의 흔적들이 있지만 작은 나라들이 약 30㎞ 이내의 반경을 경계로 이웃하며 공존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평화로운 시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창녕의 북쪽 합천에 다사국이 위치하고, 최근에 잘 알려진 함안의 아라가야도 그 정도의 범위 내에 있다. 어쩌면 경쟁 속 공존의 사회가 가야의 본성일 것이다. 하지만 신라가 팽창하면서 비화가야에서 보듯 가야의 제국들은 회유나 전쟁으로 하나둘씩 스러져 갔다.
창녕 고분들의 수난
많은 사람을 동원해 큰 무덤을 만드는 것은 이미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 시작됐다. 고대국가 지도자의 무덤들은 안에 죽은 사람을 두는 공간의 구조는 달라도 외부는 흙이나 돌을 쌓아 높고 크게 만들었다.
창녕 곳곳에 남아 있는 고총(高塚) 고분들은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수난을 겪었다.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려 1911년 세키노(關野)라는 고고학자에 의해 고분들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는데, 1910년 후반 조사의 기록에는 마차 20대 분과 화차 2량분의 유물이 수습됐다. 현재 국립박물관에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만, 당시 도굴이 성행했고 지금도 일본 도쿄박물관의 오쿠라 컬렉션에 이곳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유물들이 많이 있다. 세계 고고학사에서 일제만큼 고고학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사례는 없으며 그 흔적들이 오늘날에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창녕 고분을 보면서 어느 시대든 진취적이지 않고 선진화되지 못하면 나라를 잃을 수도 있고, 스스로의 역사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다.
송현이가 묻힌 고분
송현이는 창녕읍 송현리 15호 고분에 순장된 여인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순장은 고대 노예사회에서 죽은 주인이 저세상에서도 이승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람을 죽여 같이 묻는 풍습이다. 오늘날에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풍습이지만 세계 어디서나 고대에 흔히 나타난다.
송현이도 다른 세 사람과 함께 독살을 당한 후 주인 무덤의 한쪽에 같이 묻혔다. 15세의 아리따운 나이에 죽었으니 스스로의 운명이 얼마나 무섭고 억울했을까? 무덤 속에 끝까지 남아서 2000년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에서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으니 긴 역사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셈이다. 키가 153㎝ 정도이니 작은 편이라고 하지만 당시로서는 보통 키일 것이다. 체격은 영양 상태에 따라 많이 달라지게 마련이니 그렇다.
송현이가 묻힌 고분은 고분군의 동편에 있는데 두 개의 고분이 연이은 표형분이라 불리는 표주박 모양의 평면 모습을 보인다. 잔디에 덮여 부드럽고 예쁜 곡선의 고분들 속의 구조는 어떨까? 창녕박물관의 옆에는 고분을 발굴해 그대로 보존한 곳이 있고, 고분공원 내에도 고분의 반을 잘라 그 구조를 볼 수 있게 만든 곳이 있다.
흔히 중심에는 돌을 쌓아 만든 석곽이나 석실이라고 부르는 방이 있고, 주위로 돌을 둥글게 둘러 무덤의 봉분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거나 묘역을 표시한 것이 보인다. 방이 여럿 있는 것도 있지만 이곳 가야 고분은 길쭉한 돌칸을 나누어 주인이 묻히는 곳, 순장자가 묻히는 곳을 구분하기도 하고 여러 부장품을 묻는 공간을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송현이는 주인이 묻힌 곳의 발치에 있는 돌칸 구역에 순장되었다. 토기나 다른 부장품도 같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내세에 사용하라고 관 위에 두었던 것들이 주저앉은 것이리라.
고고학자들에게 의문으로 남는 것은, 왜 주인의 뼈는 삭아 없어진 반면 순장된 사람들의 뼈는 남았는가다. 죽은 사람의 시체가 빨리 삭아 사라지는 것이 명당의 조건이라고 하지만 같은 무덤 속에서도 이렇듯 다른 것은 왜일까? 미세환경이 달라서? 어쩌면 마신 독이 미생물의 접근을 막아서일지도 모르지만, 서러운 운명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고분공원에서 세상을 보니
화왕산을 등지고 옛날 솟대마을이었다는 송현동 고분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창녕 시내는 평화롭다. 공원에 바짝 붙어 집들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오랜만에 삶과 죽음이 같은 공간에서 이어짐을 본다. 오늘날 우리 도시에서는 죽음에서 삶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 이곳 박물관에 복원된 송현이의 모습은 창녕 시내를 걸어가는 소녀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천오백년 전의 슬픈 역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것은 시간의 묘약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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