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대구에 사는데 아이 교육 때문에 이사를 했다고 하면, 행선지를 묻지 않고도 지레 짐작한다. '수성구로 갔나 보다.' 그러나 최성열(38) 김윤희(36) 부부는 연우(8) ·선우(5) 형제의 교육을 위해 정반대를 선택했다. 가족은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대구 중심부에서 차로 20분가량 떨어진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학습지 교사도 방문하지 않는 시골 마을이다.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생활 패턴으로 살면서 아이들에게 창의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컸다. '남들처럼' 대구 중구의 30평대 아파트에서 살던 부부는 1년 반 전, 대구 달성군에 단독주택 '인스케이프(대지면적 330.00㎡, 연면적 199.71㎡)'를 짓고 이사 왔다. 명문 학군, 화려한 학원가 대신 곁에 두기로 한 건 자연이다. 일자로 뻗은 직사각형 모양의 집은 정면에 난 커다란 창을 통해 외부의 꽃과 나무, 수려한 산세를 품는다.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서향집
집 안에 들어오면 서쪽을 향해 난 전면 창 너머로 근사한 풍경이 펼쳐진다. 근경은 앞마당과 뽕나무 밭이고, 원경은 주암산이다. 건물과 마당을 인접 도로보다 1m가량 들어올려 지어, 내부의 시선이 집 앞 도로 대신 먼 풍광에 닿도록 했다. 집 내부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집은 서쪽 창을 바라보는 형태로 주방, 거실, 서재, 운동실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현관에서 반대편 운동실까지 벽 하나 없이 확 트여 있어 개방적인 분위기다. 각 방이 위치한 뒤편(동쪽)에 계단, 화장실 등 보조공간을 뒀다. 설계를 맡은 김건철 스마트건축사무소 소장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주방을 지나고, 거실을 지나고, 1층을 걸어가며 모든 방에서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고 설명했다.
서향집은 장점과 단점이 분명하다. 집 안에서 노을을 매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장점, 햇빛이 오후 늦게까지 집 안 깊숙이 들어오는 것은 단점이다. 서향집의 여름나기가 유독 힘들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건축가는 서향집의 단점을 덧문을 통해 보완하고자 했다. 햇빛이 강한 유럽이나 남미의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다. 1층은 외벽 마감재인 노출콘크리트와 같은 색상의 회색빛 철문으로, 2층은 목재(멀바우)와 동일한 재료로 덧문을 만들고, 필요할 때 햇빛을 차단할 수 있도록 했다. 덧문이 열려 있을 때는 접혀 있는 모양새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외관에 입체감을 더한다.
인테리어는 최대한 절제했다. 가구는 가급적 내부 마감재와 동일한 재료로 맞춰 튀지 않도록 했다. 건축가는 "그래야만 바깥에 있는 풍경이 오롯이 실내로 들어오고, 우리가 실내에서 바깥을 더 잘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집 이름 '인스케이프(inscape)'의 뜻도 이와 맞닿아 있다. 집에서 창 밖의 풍경(scape)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이 풍경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집 안으로 풍경이 들어오기도 한다는 의미다.
건축주는 그래서 이 집을 "산수화 같은 집"이라고 표현한다. "산수화를 보면 풍경 속에 집 한 채씩은 있잖아요. 그 집 한 채가 우리 집 아닐까, 생각해요." 인스케이프는 2021년 대구시 우수건축물, 2021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신진건축사부문 대상작으로 선정됐다.
집합수납공간부터 미끄럼틀까지
나만의 집은 획일화된 집에선 상상하지 못했던 공간을 탄생시킨다. 아내가 건축가에게 제안해 설계된 2층의 '집합수납공간'이 대표적이다. 집합수납공간에는 화장실, 욕조, 세탁기, 건조기, 파우더룸, 드레스룸이 모여 있다. 가족들은 이 방 저 방 옮겨다닐 필요 없이 한 곳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세탁까지 한다. 1, 2층을 연결하는 계단과 미끄럼틀이 나란히 놓인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활동적인 아이들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 때 계단보다 미끄럼틀을 애용한다. 친구가 집에 놀러왔을 때 제일 먼저 자랑하는 공간이다.
2층 아이들 방은 중앙에 슬라이딩 도어를 달아 가변적으로 구성했다. 아직은 어려서 함께 지내지만 좀 더 커서 각자의 방이 필요하게 되면 가구 배치만 바꿔 공간을 분리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가는 아이들 방에 "색다른 공간감을 주고 싶어" 다른 방의 평평한 천장과 다르게 모임지붕 모양의 천장을 만들었다.
1층 서재 가운데에는 가족이 빙 둘러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놓았다. 부부와 아이들은 이곳에서 함께 책을 읽고 숙제도 하고, 노래하고 일도 한다. 사교육을 안 하다 보니 부부가 서재에서 아이들을 직접 가르칠 때가 많다. 서재는 일반적으로 조용한 공간에 배치하지만 이 집의 서재는 다른 공간과 분리되지 않고 열려 있다. 다만 주방과 거실보다 45㎝ 낮게 배치해, 서재에 있으면 주방, 거실의 시선으로부터 숨어 있는 아늑한 기분이 든다.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집
전원 생활에 불편함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새벽 배송도 안 되고 흔한 학원 하나 없다. 막상 와보니 덜컥 불안함이 덮쳤다. 그럼에도 도시의 공동주택에서는 얻기 힘든 점 때문에 "잘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아이들이 자연에서 놀이를 통해 배우면서 마음이 훨씬 편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게 느껴져요. 예전에는 화나면 울기부터 했는데 이제는 자기 감정 표현도 잘 하고요. 이곳 생활이 아이들에게 특별한 자산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첫째가 다니는 전교생 160명의 초등학교는 돌봄교실이나 방과후수업 등록조차 경쟁이 치열한 도시 학교와 달리, 아이들을 전담해 오후 늦게까지 보살펴 준다.
가족은 이웃 어른들과 인사하고 교류하며 서로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시골 분위기도 배워가는 중이다. 사생활 침해를 염려했을 법도 한데, 낯선 동네에 전원 주택을 지을 때 선호하는 중정형 주택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끼리 성(城) 같은 집에서 똘똘 뭉쳐 폐쇄적으로 생활하면 전원에서 얻는 게 있을까"라는 생각에서다.
아이들도 자연과 맞닿은 집에 살면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늘어간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봄에 피는 꽃들에 대해서 배우는데, 저희 아이들은 마당에 핀 수수꽃다리, 산수유를 봤으니 외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이 지금처럼 자연 속에서 마음이 풍요롭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살다가 힘든 일이 닥쳐도 좀 더 유연하게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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