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코 노리다케 '형제의 숲'
편집자주
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동네를 뒤덮었던 선거 현수막이 이제 내려갔다. 선거는 정책 대결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망각한 것 같은 분위기에서, 지방의원 후보자들은 여전히 길을 새로 내고 건물을 올리고 새로운 사업을 유치해서 지역을 개발하겠다는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세웠다.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내가 사는 제주도는 한정된 자원을 개발하느냐 보존하느냐의 문제가 늘 첨예한 논쟁거리다. 환경문제는 미래 세대에게는 명운이 걸린 중요한 이슈지만 제대로 된 공약도 찾기 힘들뿐더러 정작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는 투표권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도 없다. 선거에서 정책이 사라지고 당장의 승패만이 중요해질 때 가장 크게 삶의 위협을 받는 이는 선거권이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이 새삼 슬프고 안타깝다.
유키코 노리다케 작가의 '형제의 숲'은 사람들이 '이 다음'을 생각한다면서 내렸던 결정들에 대해 돌아보게 해주는 그림책이다. 압도적으로 커다란 크기의 책에는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하고 목가적인 풍광이 가득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짧은 글들이 오래도록 성찰할 거리들을 안겨준다. 앞표지에는 푸른 숲과 강변을 배경으로 누워 있는 두 남자가 보인다. 둘 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하지만 각자 짝을 만난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터를 잡고 살아간다. 검은 머리 남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어 먹고산다. 반면 노란 머리 남자는 엄청나게 넓은 터를 잡은 뒤 경계선을 치고 진입로를 닦는다. 검은 머리 남자 옆에서는 흰옷을 입은 짝이 항상 함께 일하고 있지만 노란 머리 남자 옆에 있던 짝은 어느 순간 숲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린다. 하지만 노란 머리 남자는 바빠서 그런지 짝을 찾지도 않는 눈치다.
두 사람의 태도는 푸른 강물에 풍덩 뛰어드느냐, 집에 커다란 수영장을 파고 강물보다 더 푸른 물속에서 헤엄치느냐 하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대비된다. 사실 통제되지 않은 상태의 자연은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야생동물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검은 머리 남자의 집보다는 인공적인 안전망이 갖춰진 노란 머리 남자의 집을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노란 머리 남자는 애초에 "다음을 생각"했기 때문에 전기톱을 들고 나무를 베었고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커다란 집을 지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류 문명의 '발전'이란 노란 머리 남자가 자랑하고 싶어하는 성취의 모습일 것이다. 노란 머리 남자는 그 집 뒤편으로 계속 숲을 개간하고 똑같은 집들을 더 많이 지었으며 "다음을 생각"하면서 자동차를 타고 더 멀리 떠난다.
반면 검은 머리 남자는 "그대로 있기"라는 소극적 태도를 취한다. 그의 작은 집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숲은 여전히 깊고 어두우며 교통수단은 자전거가 전부다. 우리는 이런 것을 '발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맨 마지막 펼침면에서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검은 머리 남자의 집과 반듯하게 개발된 노란 머리 남자의 대도시를 비교해 조감하는 순간, 독자들은 분명 눈부신 발전의 결과를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감정에 휩싸일지도 모르겠다.
땅을 소유물로 생각하며 사고파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여러 대륙의 원주민들은 노란 머리 남자 같은 정착민들에게 땅과 삶을 모두 빼앗겼다. 자연을 '정복'하는 방식의 발전을 지향하지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와 고유의 철학은 다분히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으로만 치부됐다. 그러나 '형제의 숲'은 검은 머리 남자를 통해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던 방식의 삶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이 다음"이란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 뿐, 자연과 비인간 존재들의 자리도, 미래 세대의 몫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까지도.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서는, 지구를 조금이라도 오래 쓰기 위해서는 자연 앞에 겸허했던 검은 머리 남자의 가치관이 더 대접받아야 한다. 우리 삶의 지향점은 끝없는 성장과 발전이 아니라 자연과 공존하고 서로 돌보는 일이 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유권자들이 지금보다 불편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욕망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이 과연 등장할 수 있을까. 경쟁, 약자 혐오, 각자도생의 가치관이 점점 더 지배하는 시대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이 다음"을 어디서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그림책을 읽는다.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가장 약한 존재의 눈으로 다시 보기 위해서, 지금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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