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우크라서 약탈한 곡물 해외 반출·판매 시도
美, 아프리카·아시아 14개국에 "사지 말라" 요청
식량난 해결? 구입 거부? 선택 앞에 놓인 빈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약탈한 곡물을 해외로 빼돌려 부당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남부 흑해 항구에서 곡물을 싣고 있는 러시아 화물선이 포착되기도 했다. 대기근 위기에 내몰린 빈국들은 서방 눈치를 보느라 굶주린 국민들을 외면할 수도, 그렇다고 러시아의 약탈 행위에 동조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지난달 중순 미국 국무부는 “러시아 화물선이 우크라이나에서 훔친 곡물을 싣고 우크라이나 인근 항구를 떠나고 있다”는 전보를 아프리카 북동부 국가들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터키 등 14개 나라에 보냈다. 흑해와 아조우해를 잇는 케르치해협과 동부 지중해 항구들을 오가며 곡물을 운반 중인 것으로 의심되는 러시아 선박 3척의 이름도 특정했다. 몇몇 외국 정부 관리는 “약탈당한 우크라이나 곡물을 사지 말아 달라고 미국 정부가 요청해 왔다”고 전했다.
러시아 해군의 흑해 봉쇄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이 중단되면서 전 세계는 식량 부족과 가격 폭등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 최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에 밀 9%, 옥수수 16%, 해바라기씨유 42%를 공급한다. 현재 저장고에 쌓여 있는 곡물은 2,200만 톤으로, 우크라이나 한 해 수출량의 절반에 가깝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제 곡물 가격이 오르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곡물을 해외로 빼돌려 싼값에 판매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2월 24일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가 도난당한 곡물은 총 50만 톤으로 추정된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1억 달러(약 1,242억 원) 규모다. 이 곡물들은 2014년 러시아에 강제 병합된 크림반도 내 세바스토폴 항구 등으로 옮겨진 뒤 해외로 반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산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조치다. 미국 민간위성업체 맥사 테크놀로지가 지난달 19일 촬영한 위성사진에는 러시아 벌크선이 세바스토폴에서 곡물을 싣고 있는 장면도 포착됐다.
미국은 러시아가 약탈 곡물을 팔지 못하도록 ‘외교적 단속’에 나섰다. 최근 러시아에서 밀 200만 톤 구입을 고려 중인 파키스탄에도 압박을 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들은 눈앞에서 죽어가는 국민들을 살리기 위해 어디에든 손을 벌려야 하는 처지다. 러시아가 싼값에 내놓는 곡물이 불법적 경로를 거치진 않았는지 따져볼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NYT는 “아프리카 빈국들은 러시아의 전쟁 범죄(곡물 약탈)로 이익을 보면서 서방 국가들을 불쾌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수십 만 명이 굶주리는 시기에 저렴한 식량을 거부할 것인지, 두 선택지 사이에서 어려운 결정에 직면했다”고 분석했다.
아프리카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밀 40%를 공급받는 탓에 기아 사태까지 우려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북동부 10개국(에티오피아ㆍ소말리아ㆍ수단ㆍ케냐 등)에선 극심한 가뭄으로 1,700만 명이 굶주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연합(AU) 의장인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은 3일 러시아 휴양도시 소치로 직접 날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 재개를 요청했다.
케냐 싱크탱크 HORN국제전략연구소 하산 칸넨제 소장은 “식량이 긴급히 필요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러시아가 공급하는 곡물 생산지가 어디인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며 “서방이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공하지 않고 곡물 구입을 거부하라는 압력만 가한다면, 오히려 그 나라들을 러시아 품 안으로 더 밀어 넣는 역효과만 가져올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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