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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전보 치고, 금강산서 억류되고"...격동의 시대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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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전보 치고, 금강산서 억류되고"...격동의 시대 산증인

입력
2022.06.08 11:59
수정
2022.06.08 16:2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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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의 파란만장한 삶

방송인 송해. 연합뉴스

방송인 송해. 연합뉴스

8일 타계한 송해(본명 송복희)는 한국전쟁과 분단 등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은 산증인이었다. 미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하나둘씩 헤쳐나가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 속 주인공처럼.

스물넷 청년 송해는 어머니, 누이와 사흘마다 헤어졌다. 1951년 1월. 황해도 재령 구월산 주변 마을엔 6·25 전쟁의 여진이 지속됐다. 전세에서 밀린 인민군 3,000여 명이 산에 숨어들었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사흘에 한 번꼴로 마을에 내려와 식량 등을 빼앗아갔다. 그때마다 청년들은 집을 떠나야 했다. 인민군에 발각되면 징집됐고 반항하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조심해라."

송해의 어머니가 집을 나선 아들에게 한 이 말은 모자의 마지막 대화가 됐다. 인민군을 피해 차가운 겨울 바다에서 조각배를 타고 얼음물을 손으로 저어가며 연평도로 간신히 몸을 숨긴 송해는 유엔의 화물선을 타고 사흘간 홀로 부산으로 내려왔다. 송해가 송복희에서 바다 해(海)자를 붙여 이름을 바꾼 것도 그때다. 배를 타고 피란 오면서 '인생이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월남한 송해는 다시 국군에 입대했다.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2015)에 따르면, 송해는 1분에 120자 이상 모스 부호를 쳐 '766 고속도 통신사' 시험에 합격해 통신병이 됐다. 모스 부호로 휴전 협정을 전군에 알린 이가 송해였다. '1953년 7월 27일 밤 22시를 기하여 전 전선의 전투를 중단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족을 두고 온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끊는 전보를 스스로 친 것이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송해는 "1983년 KBS에서 생방송으로 이산가족 찾기를 할 때도 혹시 몰라 가 있었다"고 했다.

영화 '송해 1927' 중 한 장면.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송해 1927' 중 한 장면.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실향민인 그는 통합의 상징이었다. 1998년 금강산 관광이 처음으로 이뤄졌을 때와 2003년 '평양 전국노래자랑' 촬영으로 잇따라 북녘땅을 밟았다. 북한행은 늘 가시밭길이었다. 북한에 송해는 눈엣가시였다. 북한 체제를 거부하고 월남한 데다 방송에서 북한을 번번이 웃음거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송해는 2박 3일 일정으로 금강산을 갔지만, 그중 하루는 꼼짝없이 배에서 나오지 못했다. 송해는 "북한 안내원이 '선생은 기다리시라요'라고 해 꼬박 하루 넘게 배에만 있었다"며 "북한 입장에선 내가 역적 중에 역적이라 떠나기 하루 전에야 배에서 간신히 내려 북한 땅을 밟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전국노래자랑' 평양 공연도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었다. 송해는 "북쪽에서 처음엔 첫인사와 끝인사만 하라고 하더라"며 "그러면 '내가 여기 왜 왔나' 싶어 북쪽 감시원 피해 무대로 몇 번 몰래 나가 '아이고 형님' 하며 나보다 한 살 많은 관객에게 절하고 그랬다"고 했다.

송해는 한때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2021)에서 "그때 KBS '10분쇼' 녹화를 하는데 국정원에서 갑자기 나를 차에 태워 갔다"며 "그때 모시바지 저고리 입고 머리 하얗게 분장한 채로 가서 빨간 불 켜진 방에서 벽 보고 서 있었다"고 옛일을 꺼냈다.

겉으론 늘 밝았던 송해의 마음엔 깊은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며 베개를 눈물로 적셨고, 20대 청년이던 아들을 1988년 너무 빨리 저 세상으로 보내는 참척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제대 후 유랑극단으로 떠돌던 시절은 그야말로 송해의 암흑기였다. 그는 "남산에 올라가서 깊은 낭떠러지를 찾았다"며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남길 가치도 없는 사람이 사라진다'란 생각으로 눈 꼭 감고 뛰어내렸는데 소나무 가지에 얹혔다"고 했다.

송해. KBS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 한국일보 자료사진

송해. KBS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내와 아이들한테 큰 죄를 지을 뻔한 아버지는 그 이후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텼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할 때 제작진에 "죽은 나무가 나와도 꽃피는 나무라고 해라"라고 당부했다. 노래로 시름을 잊으려는 대중의 기운을 살려줘야 한다는 취지였다. '전국노래자랑'에선 '땡'을 받은 지원자도 주인공이 되는 이유다. 엄영수 코미디언협회장은 "온갖 위기와 역경을 다 겪으셨는데 송해 선생님은 결국 다 극복하셨다"며 "하늘이 내린 어른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송해는 스물두 살 때인 1949년 황해 해주음악전문학교(현 평양음악대학)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해 성악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노래하면 집안 망한다'며 아들의 예술학교 진학을 반대했지만 가난한 살림에도 어머니가 쌀을 팔아 아들의 학비를 몰래 댔다. 음악 엘리트였던 그는 군 복무 때도 타고난 재능과 끼를 감추지 못했다. 군인 송해는 3군 노래자랑 종합 콩쿠르에 출전했고 최우수상을 받아 운명처럼 '딴따라'의 길로 접어들었다. 다양한 예능을 지녀야 하는 악극단 생활을 했던 송해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신세 좀 지자구요'(1969)에도 출연했다. 남과 북에서 송해는 요즘 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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