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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허비하는 청춘"...'계란 흰자' 수도권 아웃사이더들의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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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허비하는 청춘"...'계란 흰자' 수도권 아웃사이더들의 아우성

입력
2022.06.10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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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가 건드린 수도권 통근자들의 애환
지방보다 더 힘든 서울 외곽 삶 조명에 공감 줄이어
경기·인천서 서울 통근·통학 인구 140여만명
"인생 20%를 길 위에서"

드라마 '해방일지'에서 기정(이엘) 창희(이민기) 미정(김지원)이 살던 경기 산포시 집. 마당 평상을 빼면 드라마 속 모습과 똑같다. 경기 연천 소재로, 실제 주민이 거주하는 집에서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촬영이 이뤄졌다. 촬영은 8일 집주인의 동의를 받고 진행됐다. 최주연 기자

드라마 '해방일지'에서 기정(이엘) 창희(이민기) 미정(김지원)이 살던 경기 산포시 집. 마당 평상을 빼면 드라마 속 모습과 똑같다. 경기 연천 소재로, 실제 주민이 거주하는 집에서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촬영이 이뤄졌다. 촬영은 8일 집주인의 동의를 받고 진행됐다. 최주연 기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제호(천호진)식구와 구씨(손석구)가 함께 대청마루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경기 연천 소재 실제 집이다. 김하겸 인턴기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제호(천호진)식구와 구씨(손석구)가 함께 대청마루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경기 연천 소재 실제 집이다. 김하겸 인턴기자

"밝을 때 퇴근했는데 밤이야". 기정(이엘)의 삶엔 저녁이 없다. 경기 외곽에서 서울로 네 시간을 출퇴근하는 그는 길에 기력을 쏟아 집에 오면 눕기 바쁘다. "차도 없고요 경기도민이예요. 어떻게 연애하고 결혼합니까? 모든 역사는 차 안에서 이뤄지는데". 둘째 창희(이민기)는 번번이 연애에 실패하는 이유가 경기 외곽에서 버스(Bus), 지하철(Metro), 걷기(Walk)로 출퇴근하는 'BMW족'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드라마 '해방일지'에서 미정(왼쪽부터, 김지원), 창희(이민기), 기정(이엘)이 나란히 승강장에 서 있다. 세 남매는 경기 외곽에서 서울로 출퇴근한다. JTBC 방송 캡처

드라마 '해방일지'에서 미정(왼쪽부터, 김지원), 창희(이민기), 기정(이엘)이 나란히 승강장에 서 있다. 세 남매는 경기 외곽에서 서울로 출퇴근한다. JTBC 방송 캡처


"어떻게 청춘이 맨날 집에 가기 바쁘냐?"

막내 미정(김지원)에게 '힙지로'는 험지다. "퇴근 후 을지로까지 올라갔다 집에 가려면 너무 멀어서". 이런 미정은 또래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 청춘이 맨날 집에 가기 바쁘냐"란 얘기를 듣고 맥이 탁 풀린다.

최근 종방한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경기 산포에 사는 세 남매는 저녁, 연애, 취미를 포기하기 일쑤다. 수도권에 살지만 일산과 분당이 아닌, 수도와 멀찌감치 떨어져 서울에 오가야 하는 경기 외곽 주민의 모습은 'n포 세대'의 삶과 묘하게 겹친다.

드라마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이 직장 동료 수진한테 받은 카톡. JTBC 방송 캡처

드라마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이 직장 동료 수진한테 받은 카톡. JTBC 방송 캡처

창업(편의점 군고구마 사업)을 꿈꾸다 돈을 말아먹은 창희와 대출까지 받아 빌려준 돈을 갚지 않고 도망간 전 남자친구 대신 돈을 갚는 미정은 산포에서 쉬 해방될 수 없다. 세 남매가 서울에 월셋집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배경이다.

경기 외곽 가상의 지역인 산포는 '인 서울'하지 못한 이들이 느끼는 고립의 상징적 공간이다. 지역적 아웃사이더들의 이런 결핍과 탈진은 '추앙' 열풍의 불쏘시개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경기 외곽 주민 사찰 드라마'는 글까지 올라왔다. 그만큼 사실적이란 뜻이다. 경기 외곽에서 서울로 통근하거나 통학하는 드라마 시청자 세 명이 9일 본보에 들려준 얘기도 이랬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이민기), 기정(이엘), 미정(김지원) 세 남매가 함께 강남역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 JTBC 방송 캡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이민기), 기정(이엘), 미정(김지원) 세 남매가 함께 강남역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 JTBC 방송 캡처


"강남서 모여 같이 택시타는 모습 완전 공감"

"경기 포천에서 서울 종로로 출퇴근해요. 자차로 왕복 세 시간이죠. '나의 해방일지' 보면서 술 먹고 나서 강남에 모여 같이 택시 타는 모습에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요. 택시비 부담도 그렇지만, 종로보다 강남에서 차 타고 집에 가는 게 더 빠르죠. 한 달에 두세 번 자정까지 야근하는 데 그때가 참 곤욕스러워요. 차 몰고 가도 새벽 2시는 돼야 집에서 누울 수 있으니. 세종에서 KTX타고 서울까지 한 시간 걸리잖아요. 그런 얘기 들을 때면 '수도권에 사는데'란 생각에 씁쓸하죠."(직장인 김종구·46)

"경기 김포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왕복 세 시간 넘게 통학했어요. 오후 11시쯤 되면 술자리 분위기가 달아오르는데 그 전에 혼자 나와 막차 타는 기분이 쓸쓸했죠. 학생이 택시 불러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으니까요. 3년을 그렇게 집에서 다니다 결국 4학년 때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짜리 방을 학교 근처에 얻었어요. 과외 아르바이트하면서 낼 수 있는 비용이었거든요. 지하였지만, 일상은 편해졌죠."(직장인 이종진·44)

"경기 남부 용인에서 통학과 통근을 다 했어요. 통학의 경우 버스로 왕복 네 시간 조금 더 걸렸고, 현재 직장이 강남권이라 왕복 세 시간 정도고요. 회식처럼 늦게 있어야 하는 모임엔 참석을 잘 안 해요. 택시를 타면 기본 5만 원은 나오거든요. 학교 다닐 땐 다들 '자취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더라고요. 자취방 보증금이랑 월세는 누가 책임지나요? 버럭했죠. 아무래도 서울 사는 친구들보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직장인 한예진·23)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기정(가운데, 이엘), 미정(오른쪽, 김지원), 창희(이민기)가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다. JTBC 방송 캡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기정(가운데, 이엘), 미정(오른쪽, 김지원), 창희(이민기)가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다. JTBC 방송 캡처


1년에 44일을 길 위에 버린 '해방 남매'

통계청에 따르면 경기와 인천에서 서울로 통근, 통학하는 인구는 약 141만 명(2020년 기준)이다. 경기와 인천에서 서울까지 출퇴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37분(왕복), 158분으로 각각 조사됐다. 서울시가 1분 단위로 수집되는 통신·교통 빅데이터를 활용해 지난해 발표한 서울 생활 이동 데이터 결과다. 서울로의 통근, 통학 시간 평균이 많게는 두 시간 반을 넘으니 드라마로 그려진 세 남매의 탈진도 허구는 아니다. 하루에 네 시간씩 한 달에 22일을 경기 인천 외곽에서 통근 혹은 통학한다고 치면, 1년에 44일을 길 위에 버리는 꼴이다.

'나의 해방일지'가 화제가 되다 보니 수도권 교통 문제는 6·1 경기지사 선거의 핵심 이슈였다. 김동연 경기지사 당선인은 지난 4월 "경기도민이 인생의 20%를 대중교통에서 보낸다는 말이 있다"며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들을 모은 영상을 봤고, 하나하나 경기도민의 애환이 묻어난다"며 교통 개선책을 공약으로 내놨다. 'GTX 플러스 프로젝트'를 통한 E 노선(인천~서울~포천) 신설 등이 대표적이다. 당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신 유승민 국민의힘 전 의원도 같은 달 SNS에 "하루에 네 시간씩 서울 출퇴근에 내 청춘을 바치는 것이, 인생의 20%를 버스나 지하철에서 보내는 것이 왜 경기도민에게는 당연해야 합니까?"라는 글을 올렸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이 출근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실제 흙길이다. JTBC 방송 캡처·최주연 기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이 출근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실제 흙길이다. JTBC 방송 캡처·최주연 기자


서울 아니면 제주? 지역성의 양극화

'나의 해방일지'는 지난달말 종방 후에도 입소문을 타며 화제를 이어가고 있다. 9일 기준 넷플릭스에선 많이 본 드라마 2위다. 지역적 아웃사이더들의 해방에 시청자들이 몰입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①신도시와 부동산 정책에 대한 실패가 울분을 키운 데다 ②서울 아니면 제주식의 이분법적인 지역성 묘사를 탈피해 새로움을 준 게 공감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신도시 개발을 했는데 집값이 잡히기는커녕 출퇴근은 힘들어졌고, 서울에 진입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며 "서울 밖에 살면서 서울에서 생활해야하는 수많은 학생과 직장인들의 울분을 이 드라마가 정확하게 건드려줬다"고 진단했다. 김성윤 사회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서울 외곽의 수도권 주민들은 겉으로 보기엔 경제·문화적 권리가 보장된 세계에 사는 듯하지만, 실제론 타율적 여건들 때문에 권리 실현을 한없이 유예하는 삶을 살고 있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경기 산포시의 마을버스 정류장(왼쪽)과 실제 배경인 경기 연천의 마을버스 정류장. JTBC 방송 캡처・김하겸 인턴기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경기 산포시의 마을버스 정류장(왼쪽)과 실제 배경인 경기 연천의 마을버스 정류장. JTBC 방송 캡처・김하겸 인턴기자


1전 2기 '해방촌' 가보니

"경기도를 뭐란 줄 아냐?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내가 산포 산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산포가 어디 붙었는지 몰라. 어차피 자기는 경기도에 안 살 건데 뭐 하러 관심 갖느냐는 거지". 드라마 속 창희는 서울 사는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친구에게 이렇게 한탄한다.

그 '흰자'는 어떤 곳일까. '나의 해방일지' 세 남매가 사는 곳은 경기 북부 연천이다. 서울에서 지하철로 가려면 경의중앙선 문산역에 내린 뒤 차를 타고 또 들어가야 한다.

여정은 고됐다. 1일 연천행에 나섰다가 중도에 포기했다. 사연은 이랬다. 3호선 녹번역에서 출발했더니 문산역까지 꼬박 1시간 10여 분이 걸렸다. 우거진 산 그리고 논과 밭이 열차를 따라 동행했다. 드라마에서 기정이 지하철을 왜 "전철"이라고 말하는 지가 떠올랐다. 임진강으로 향하는 이 노선은 지하로 다니지 않는다. 종점 직전 문산역에서 내린 뒤 차를 갈아타려 했더니 일반 버스 배차 시간이 30분을 훌쩍 넘었다. 휴일이라 차가 더 없는 듯 보였다. 결국 시티투어 버스를 잡아 20여 분을 달렸더니 이번엔 허망함이 매복 중이었다. "반대 방향으로 타셨습니다". 길을 묻자 돌아온 운전 기사의 말에 의지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결국 지하철을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손석구)가 살던 집. 최주연 기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손석구)가 살던 집. 최주연 기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손석구)와 미정(김지원)이 마당 평상에 앉아 이야기 하고 있는 장면. 오른쪽은 경기 연천군 소재 실제 촬영지다. 집주인이 구씨의 대표 소품인 소주와 소주잔을 내주었다. JTBC 방송 캡처·최주연 기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손석구)와 미정(김지원)이 마당 평상에 앉아 이야기 하고 있는 장면. 오른쪽은 경기 연천군 소재 실제 촬영지다. 집주인이 구씨의 대표 소품인 소주와 소주잔을 내주었다. JTBC 방송 캡처·최주연 기자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8일 차를 몰고 다시 세 남매의 집을 찾았다. 서울역에서 한 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세 남매의 집은 마당 평상이 사라진 걸 빼곤 그대로였다. 집 옆엔 드라마에서 세 남매 아버지 제호(천호진)와 구씨(손석구)가 나무를 다듬던 싱크대 공장 건물이 서 있었다. 마침 용달차 한 대가 집으로 들어섰다. 극에서 제호가 몰던 용달차와 비슷한 색과 크기였다. 세 남매의 집엔 실제 주민이 살고 있다.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드라마 촬영을 했어요. 애들은 다 출가해 우리 부부만 사는데, 촬영할 땐 집 안에서 TV보고 있었죠. 집 밖에서 찍고 집 내부는 다른 세트에서 찍었거든요." 이날 만난 세 남매의 실제 집주인의 말이다.

집에서 흙길을 따라 7~8분 여를 걸으니 드라마 속 세 남매가 서울로 출근할 때 탔던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드라마와 달리 페인트칠은 바랬고 인적은 찾기 어려웠다. 서울로 나가는 길목, 경기 외곽의 맨얼굴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은 경기 외곽에서 서울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의 애환을 아예 이해하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서울 사는 친구가 경기 외곽으로 놀러 온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죠. 늘 제가 '서울로 가줘야지'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한예진)


양승준 기자
김유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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