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멀쩡… 내부는 아수라장
"지진 난 듯 흔들거리더니 '꽝' 굉음
출입문으로 연기·화염 밀려 들어"
"지진이 난 듯 흔들거리더니 바로 '꽝' 하는 굉음이 났어요."
대구 범어동 법무빌딩 화재 참사는 순식간에 소중한 7명의 생명을 집어삼켰다. 생존자와 목격자들은 "피할 틈도 탈출구도 없는 아비규환이었다"고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당시 참혹한 상황을 가까스로 읊조렸다.
9일 사고 직후 찾은 W빌딩은 겉보기엔 멀쩡했다. 매캐한 연기 냄새와 깨진 유리창, 인명구조와 진화를 위해 소방관이 걸쳐 놓은 사다리만이 화재 현장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자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건물 주변엔 탈출과정에서 흘린 휴대폰과 신발, 핸드백 등 개인소품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화재 당시 다급함이 온전히 전해졌다. 화재감식을 위해 내부에 진입한 국과수와 소방당국 관계자들은 "불에 심하게 탄 문틀과 사무용품, 서류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고 전했다.
생존자들은 "방화 낌새도 없이 갑자기 불이 번졌다"고 입을 모았다. 일부 입주민은 "화재경보기 시험인 줄 알았다"고 혀를 내둘렀다. 불이 난 203호 사무실 바로 위층에 근무하던 직원은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재경보기가 계속 울리길래 출입문을 열어 보니 복도와 계단에 유독가스가 가득차 나갈 수 없었다"면서 "창문으로 탈출하기엔 너무 높아 안절부절못했는데 다행히 진입한 소방대원들이 방독면을 줘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같은 층 바로 앞 사무실에 근무하는 한 변호사는 “1, 2초간 건물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폭발음과 여성 비명소리가 들렸다”며 “다른 직원이 ‘불이 났으니 대피해야 한다’고 하는 순간 화염과 연기가 밀려왔다”고 긴박한 사고 상황을 전했다. 그는 "탈출구를 찾아 헤매다가 비상문을 열고 대피했다”면서 “철문의 존재를 몰랐다면 우리 사무실 직원 5명 모두 질식사했을 것”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피 중에 부상을 입은 경우도 다반사였다. 5층에 근무하던 한 직원은 “누군가 ‘불이 났다’고 해 밖으로 뛰쳐나오던 중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생존자 대부분은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불이 난 203호 반대편 현관 쪽 사무실에 있다가 탈출한 직원은 “꽝 하는 폭발음에 놀라 대피하려고 했지만 연기가 자욱하면서 불길이 우리 사무실로 빠르게 들어오려 했다”며 “유리창을 깨고 소방대원들이 놓아준 사다리를 타고 간신히 탈출하는데 유리 파편에 손이 찢어진 분들이 여럿 보였다”고 했다.
건물 상부층에 입주해 있던 한 변호사는 “우리 사무실 일부 직원은 유리창을 깨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너무 높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변호사도 “갑자기 연기가 아래층에서 올라와 밑으로는 대피할 수 없었다"고 했다.
화재가 발생한 빌딩은 동남쪽이 높고 북서쪽이 낮은 경사지에 위치해 있다. 남쪽에서 보면 지하층이 반대편 지상 1층보다 더 높은 구조다. 또 각 층별로 하나의 층을 합판 등 가벽으로 구분해 변호사, 법무사 사무실로 사용해왔다. 건축법상 스프링클러나 방화벽 설치 대상이 아니어서 피해를 키웠다. 스프링클러는 사무실이 아닌 지하에만 설치돼 있었다.
이날 화재가 난 곳은 대구백화점 계열사 건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1996년 1월 준공했다. 사실상 건물 최상층인 5층에는 당시 구본흥 회장 집무실이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매각했다. 이후 인수자가 채무를 갚지 못해 경매에 넘어갔고, 일부 변호사들은 보증금을 떼이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 '비운의 건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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