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2000년 홍석천의 커밍아웃이 센세이션을 불러 왔다면, 2001년 하리수의 등장은 그야말로 핫이슈였다. 홍석천과 달리 하리수는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는 소문만 남긴 채 어느 순간 미디어에서 뜸했는데, 얼마 전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건재함을 세상에 알렸다.
데뷔 당시에도 하리수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숫자는 1이었다. 그 1이 2로 바뀌고 이름이 '이경엽'에서 '이경은'이 된 건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로 온 나라가 들끓던 그해 여름 부산에서 획기적인 결정이 있었다. "1. 부산광역시 서구청에 비치된 신청인 A의 호적상 성별란 기재 '남'을 '여'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한다. 2. 신청인 A의 이름을 개명하는 것을 허가한다."(2002. 7. 3. 부산지방법원 가정지원 2001호파997, 998)
A는 미용사가 되고 싶었으나 주변의 멸시와 눈총을 견딜 수 없어 게이 클럽에서, 그의 말에 의하면 '죽기보다 싫은 공연'을 하며 살았고, 신분을 확인할 때마다 인간적인 모멸감으로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고 했다. 하리수의 성별정정도 부산지법의 결정을 토대로 이뤄졌고 결국 대법원이 2006년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정정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고종주 판사는 결정문에서 '보편타당한 원리를 추구하는 사법은 본래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부정함으로써 우리가 지켜야 할 보편타당한 원리는 없다. 신청인이 자신의 본래 성을 주장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질서유지나 선량한 풍속 또는 공공복리에 반한다고 볼 근거가 없다. 성전환자들이 성 정체성에 관한 장애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으로서 우리와 함께 섞여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배려하고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사법이 추구하는 바다'라고 설시했다.
이게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동안 페이스북(2004)과 유튜브(2005), 카카오톡(2010)과 불닭볶음면(2011), 무인자동차(2012)가 등장했고 알파고가 이세돌을 제압했다(2016). 불과 20년 만에 세상이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으니 인권 역시 드높아졌을까. 전혀 아니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발의된 후 15년째 제정되지 못하고 있고, 서울시는 올해도 퀴어축제 조직위가 제출한 서울광장 사용신청 처리를 시민위원회로 넘겨 미루고 있다. 인권의 최전선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두꺼운 얼음을 깨는 쇄빙선 역할을 하던 미국 연방 대법원조차 백래시에 휘청이고, 로앤웨이드(Roe v. Wade) 판결마저 뒤집힐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린다.
성의학자 윌리엄 라이너 박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성기는 외부생식기가 아니라 뇌(The most important sex organ is the brain.)"라고 말한 바 있다. 성기가 뇌에 있듯 대상에 대한 호오(好惡)도 머릿속에 각인되거나 때론 생래적이기까지 해서 이를 바꾸기가 무척 어렵다. 그러나 인권은 기호나 사적 자유를 이유로 함부로 취사하거나 침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지 않을 자유와 혐오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와 당위의 간극을 메꾸는 것이 바로 법이다. 법은 평시에는 최후방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혐오라는 괴물에 먹히지 않도록 굳건히 지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선두가 포위되고 대오가 사분오열하는 비상시에는 과감하게 혈로를 뚫기도 한다. 세상이 자꾸만 뒤로 가려는 요즘 같은 때에는 법이 앞장서야 한다. 너무 늦거나 법마저 실패하면 공멸을 각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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