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동네 고깃집에 갔는데 늘 나오던 쌈채소 바구니가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쌈채소 가격이 크게 올랐는데 쌈용으로 내면 버리는 게 너무 많아서 무침으로 바꿨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상추 무침 한 주먹이 담긴 접시가 올라와 있었다. 직원은 “집 냉장고에 남아 있던 쌈채소를 싸와서 드시는 손님들도 있다”며 “뭐라고 안 하니 담엔 가져오시라”고 귀띔해줬다.
□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청상추 4㎏의 도매가격은 13일 기준 평균 1만7,460원으로, 평년(1만2,729원)보다 훨씬 올랐다. 깻잎은 2만3,780원(2㎏)으로, 평년(1만6,129원)과 비교해 상승 폭이 더 크다. 평년 도매가가 4만2,497원(10㎏)이던 풋고추도 5만5,560원이나 됐으니, 식당이고 가정이고 자투리 채소까지 안 아까울 수가 없다. 고깃집 가기 전 냉장고에 남은 채소가 있나 찾아보게 생겼으니, 고물가 시대를 산다는 게 실감 난다.
□ 요리하고 남은 식재료나 먹다 남은 반찬 등 냉장고에 들어 있는 내용물만 활용해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을 흔히 ‘냉장고 파먹기’라고 한다. 새로 장을 보지 않아도 되니 한때 알뜰소비의 수단으로 통했다. ‘냉장고를 부탁해’란 TV 프로그램은 냉장고 파먹기의 전문가 버전으로 인기를 모았다. 연예인들이 자기 집 냉장고를 통째로 들고 나와 공개하면 유명 셰프들이 그 냉장고 속 재료들만 이용해 15분 사이에 경쟁적으로 멋들어진 요리를 창작해냈다. 코로나19 대유행 초기엔 장 보러 못 나간 사람들에게 냉장고 파먹기가 생존의 수단이었다. ‘집콕’이 길어지자 ‘선반 파먹기’로 버전도 확대됐다. 상온에 오래 보관 가능한 가공식품을 왕창 사서 선반에 두고 야금야금 파먹으며 대유행을 났다.
□ 코로나19와 함께 흐지부지될 것 같았던 냉장고 파먹기가 요즘 부활하고 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본래 목적에 아이디어와 재미가 더해졌다. 같은 재료로 소스만 바꿔 가며 다른 요리를 만드는 노하우를 온라인에 공유하는가 하면, '냉파'와 '선파'로 버틴 일주일치 식단을 올려 인증하는 유행도 생겼다. 고물가 위기를 초라하지 않게 헤쳐 가려는 지혜와 재치가 엿보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