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브릭 레인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영국 런던 출장 중에 시간을 쪼개 브릭 레인을 찾은 건 순전히 베이글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안국역 근처에 있는 유명 베이글 전문점 앞은 매일 오전 8시 개점 시간이 되기 한참 전부터 '오픈런'을 노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개점하고 나서 한참은 ‘저러다 말겠지’ 싶었다. 이른바 오픈발이 좀 사라지면 가봐야지라고 생각했으나 오판이었다. 몇 달을 넘어 해가 바뀌도록 좀처럼 대기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서울 동쪽의 한 실내 포장마차에서 뉴욕에서 온 한 친구와 소주를 마시며 그 얘기를 했다. “오후 1시가 좀 넘으면 그날 만든 빵이 동이 난다더라”라는 내 얘기를 듣고, 친구는 뉴욕 베이글 부심을 부렸다. 베이글, 하면 뉴욕이라고, 베이글의 박물관이라면 런던이 아니라 뉴욕을 붙여야 맞다고. 생각해보면 두 나라는 아예 베이글의 스펠링마저 다르게 쓴다.
과연 뉴욕의 베이글(bagel)과 런던 베이글 뮤지엄의 베이글(beigel)은 맛이 얼마나 다를까?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천성은 천형이다. 결국 아침 일찍 눈을 뜬 어느 주말 오전 7시 30분,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아내를 끌고 '오픈런'을 시도했다. 대기표를 뽑은 시각이 아직도 기억난다. 7시 44분이었고 대기번호는 42번이었다. 원서동에 사는 나보다 먼저 와서 번호표를 뽑은 사람이 41팀이나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맛은 어땠냐고 묻는다면, 그 뒤로도 가끔 눈이 떠지면 오픈런을 하기 위해 런닝 슈즈를 신고 뛴다는 대답으로 대신해야겠다.
‘브릭 레인의 베이글’이라는 말을 처음 본 건 런던 베이글 뮤지엄의 브랜드 소개글에서였다. 정확하진 않지만, ‘우리는 런던의 브릭 레인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의 베이글 맛을 재현하려 노력했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호라. 브릭 레인에도 유대인 커뮤니티가 있고 그 삶들이 베이글을 만든다는 말이지?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천성은 진짜 형벌이다.
결국 나는 지난 5월 말 브릭 레인의 북쪽 끝에 있는 베이글 베이크(Beigel Bake) 앞에 서 있었다. 뭉근하게 쪄낸 소고기 양지 부위에 입술이 쪼그라들 만큼 짜게 소금 간을 한 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달지 않은 머스터드와 함께 베이글 안에 넣은 ‘솔트 비프 베이글’을 주문했다. 테이블이 없는 가게 밖에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듯 종이봉투로 싼 소고기 베이글을 움켜 쥐고 겨자 양념 하나라도 흘릴까, 깨끗이 흡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거리는 이미 유대인들의 것만은 아니었다. 이 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역사를 좀 살펴보면 이렇다. 어느 나라든 이주민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회당을 건설하기 마련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한인 교회가 많은 것도 비슷한 이치다. 브릭 레인 59번지, 브릭 레인과 푸르니에 스트리트가 만나는 코너에는 방글라데시 무슬림들의 모스크가 있다. 오래 전 리젠트 파크에 있는 런던 세트럴 모스크와 화이트채플 로드에 있는 이스트 런던 모스크에게 런던 최대의 모스크 자리를 내주었으나, 한때는 ‘런던 그레이트 모스크’로 불리던 곳이다. 300년 전만 해도 이 건물의 첫 이름은 ‘새 교회’였다. 개신교 신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는 얘기다.
1685년, 프랑스는 낭트 칙령을 폐지했다. 카톨릭 뿐 아니라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했던 바로 그 칙령이다. 당시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허리였다. 인구의 6분의 1에 달했고 부르주아거나 기술자 혹은 단순 노동자들이었다.
낭트 칙령이 폐지되자 약 20만 명의 기술자가 달아났다. 이때 영국으로 이주한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당시의 런던 외곽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이야 이스트엔드도 런던이지만, 당시엔 타워오브 런던 밖은 허허벌판이었다. 서울 압구정동에 현대 아파트가 없던 시절을 생각하면 되겠다. 런던으로 이주한 위그노들에게 이렇다 할 재산은 없었으나 기술이 있었다. 바로 실크를 짜는 기술이었다. 18세기 초반에 이민 온 아이리시 노동자들과 함께 위그노들은 한때 스피드 퀴즈에서 설명자가 ‘스피탈필드’라고 외치면 ‘실크’라고 누구나 답할 정도로 유명했다. 이 위그노들이 실크를 판 돈으로 새 땅에 온 새 마음으로 짓고 ‘새 교회’(La Neuve Eglise)라 이름 붙였던 건물이 지금의 브릭 레인 모스크다.
개신교 교회가 있던 자리에 곧바로 모스크가 들어선 것은 아니다. 마치 예루살렘이 같은 신을 믿는 세 종교의 성지이듯 개신교의 구약만을 믿는 유대교도들이 1891년에 사들여 ‘율법의 옹호자들’(Machzike Hadath)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체 왜,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19세기 초부터 약 100년 동안 지금의 동유럽을 포함한 제정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을 주 타깃으로 하는 조직적 약탈과 학살이 자행됐다. 러시아어로 ‘포그롬’이라 부르는 이 학살은 제정 러시아 전역에 들불처럼 번졌다. 1881년에는 제정 러시아 내에서 새로운 유대인의 정착을 임시적으로 금지하는 '5월법'마저 공표됐다. 율법의 옹호자들은 그런 슬라브 민족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 온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이었다.
이민자들은 사회의 낮은 곳에 정착한다. 유대인들이 몰려들 무렵 브릭 레인은 ‘런던의 시궁창’이라 불렸다. 빅토리아 시대에 실크 산업은 쇠락했다. 브릭레인을 포함한 스피탈필드 지역전체가 슬럼화 됐다. 1888년부터 1891년 사이 브릭레인에 맞닿아 있는 화이트채플 스트리트에서 11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잘은 몰라도 이름은 익숙한 익명의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브릭 레인을 포함한 스티팔필드, 스피탈필드를 포함한 이스트엔드가 빈민가라는 인식이 확고해진 것이 이때다.
한동안 브릭 레인은 유대인 포목상들의 거리였다. 쉬마타(이스라엘의 전통복장을 짓는 직물) 상인들이 잔뜩 점포를 차지하고 있었고 가정에서 구워 온 베이글을 광주리째 들고 와 파는 여자들도 있었다. 사정이 달라진 것은 1970년대 동파키스탄에 독립 전쟁이 터지면서부터다. 당시 독립한 동파키스탄이 우리에게 익숙한 무슬림 뱅골인들의 나라 방글라데시다. 수많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포화를 피해 런던으로 향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직물 산업 때문이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이주민들이라도 직물 공장에는 취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에 유대인은 없다. 그나마 베이글 베이크가 있는 브릭 레인 북쪽에 남아 있긴 하지만 다수는 아니다.
베이글을 해치우고 눈을 들자 브릭 레인 도로 한 켠에 노점들이 자리를 펴고 있었다. 내가 간 날이 마침 선데이 마켓(주말시장)이 서는 날이었던 건 행운이다. 우리는 뭔가에 홀린 듯 하염없이 브릭레인을 따라 걸었고, 그 길의 끝에 다다랐을 때 브릭 레인 모스크를 찾았다. 베이글 가게에서 시작해 모스크에서 끝난 우리의 여정, 유대계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방글라데시 무슬림의 사원에 이른 그 여정은 글줄로는 3줄이지만, 4시간 정도 걸렸다. 파키스탄 사람이 파는 일본 음식을 먹었고 인도 사람이 튀긴 고로케를 맛봤다. 그리고 양념 치킨. 양념치킨이 브릭 레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각 나라의 먹거리 노점들이 일요일마다 문을 여는 선데이업 마켓에선 일본인도, 인도 사람도, 히말라야에서 왔다는 사람도 양념치킨을 팔았다. 나이지리아 출신 아티스트가 직접 그렸다는 달력을 샀고 일행은 런던에서 유학중이라는 일본인 미대생이 제작한 휴대폰 케이스를 구입했다. 바이닐을 잔뜩 담은 박스를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노점에선 폴란드인 이주민이 추천한 엘라 핏츠제랄드가 부른 콜 포터의 송북을 샀다. 그녀는 폴란드 사람이지만 유대계 혈통은 아닌 듯 했다. 머리카락이 뿌리까지 금발이었고 눈은 초록색이었다.
거리를 걸으며 브릭 레인이 유대인의 거리라는 환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 거리가 위그노의 거리였던 역사도, 뱅갈인의 보금자리일 것이라는 현재도 모두 사라졌다. 애당초 런던 타워 바깥 아무 것도 없는 땅에 위그노들이 몰려와 직물을 짜겠다고 했을 때, 영국의 왕은 빈민 구제를 위해 정착금을 지원했다.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도망쳐 나오던 때 그들을 받아준 유일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지금의 브릭 레인은 그 모든 시절의 영광을 합한 것 만큼 다채롭게 빛난다. 런던을 잘 아는 누군가는 ‘관광객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서울 촌놈의 눈에는 부실만큼 빛난다. 수십의 인종, 수 천명이 서로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흘러가던 그날의 활기와 흥분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명심할 것. 브릭 레인의 주인은 이제부터 양념치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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