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현재 미국은 와인 생산량 세계 4위다. 50개 주 전역에서 와인을 생산할 만큼 와인 산업이 발전했다. 유럽보다 늦게 시작한 미국 와인이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된 데에는 와인의 거장이라 불리는 로버트 몬다비의 공이 크다.
미국 와인의 기원은 어쩌면 1,000년 전에 비롯했을지 모른다. 콜럼버스보다 500년이나 앞서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에 발을 디뎠기 때문이다. 낯선 대륙에는 야생 포도와 온갖 베리가 무성했다. 그들은 대륙을 둘러보고는 포도나무의 땅, 빈란드(Vinland)라 이름 붙였다.
'여우 냄새 나' 외면 당한 미국 와인
400년 전에는 북아메리카 초기 정착자들이 동부 연안에 도착했다. 이들 또한 먼 옛날 바이킹들처럼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그런데 와인을 빚으니 맛이 시큼할뿐더러 냄새도 이상했다. 아메리카종(비티스 라부르스카)은 와인용으로 알맞은 유럽종(비티스 비니페라)과는 다른 탓이었다. ‘신 포도를 포기한 여우’처럼 그들은 와인에서 여우(foxy) 냄새가 난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한번 들인 ‘맛’은 향수병만큼 지독하지 않은가. 신대륙 이주자들은 ‘고향(유럽)의 와인 맛’을 보고 싶어 무척 애를 썼다. 1619년 영국 델라웨어 남작이 유럽종 포도나무를 들여와 버지니아에 심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죽었다. 동부의 기후는 포도나무에 가혹한 데다 유럽종 포도나무는 필록세라 같은 신대륙 병충해에 저항력이 없었다. 이후에도 숱한 시도가 있었지만 숱한 실패로 이어질 뿐이었다. 무려 200년 동안이나.
서부에 자리 잡은 와인 '미션'
신대륙에 유럽종이 뿌리내리지 못하자 아메리카종과 유럽종을 교배한 품종을 심거나 아메리카종을 재배했다. 1830년 니콜라스 롱워드는 오하이오에서 카토바(아메리카종)로 와인을 생산했다. 특히 스파클링 와인은 유럽에도 수출할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았다. 그런데도 그는 유럽종 포도나무를 재배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신대륙 서부로 건너와 와인을 빚은 이들도 있었다. 스페인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을 만들었다. 이들이 가져온 포도나무는 유럽종이었다. 선교사들인지라 포도나무에 선교를 뜻하는 ‘미션’이란 이름을 붙였다. 미션은 캘리포니아에 뿌리를 내렸다. 서부는 동부와는 달리 기후가 포도나무 재배에 알맞고 험준한 로키산맥이 필록세라를 막아준 덕분이었다.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서부를 손에 넣었다. 이듬해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골드러시였다. 이때 금빛 꿈을 꾸며 몰려든 많은 이민자와 사업가 덕분에 와인 산업도 금자탑을 세울 듯 성장했다.
소노마 지역에 헝가리 이민자 오거스톤 하라즈시가 부에나 비스타 와이너리를 세웠다. 나파밸리에도 이민자들이 세운 찰스 크룩 와이너리, 슈램스버그, 베린저 빈야드, 잉글눅 와이너리 등이 들어섰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와인 산업이 또 다른 ‘노다지’임을 확신했다. 그의 지시로 1861년 하라즈시는 유럽 각지를 돌며 350여 종의 유럽종 포도나무를 미국에 들여왔다.
필록세라 견딘 프랑스산·금주법... 미국 와인의 악재
캘리포니아 와인이 한창 성장을 거듭하던 1889년, 파리세계박람회가 열렸다. 이곳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은 상을 34개나 받았을 정도로 선전했다. 하지만 ‘꽃길’은 잠시였다.
1800년대 후반 필록세라를 극복한 프랑스 와인이 수입되어 미국 와인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캘리포니아에 필록세라가 뒤늦게 번졌다. 경제는 불황이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진짜 시련이 남아 있었다.
1920년 금주법이 시행되자 알코올음료의 제조, 판매, 운송, 수출입은 물론 소유마저 금지됐다. 와이너리들은 버틸 여력이 없었다. 금주법은 와인 업계를 고사시키는 또다른 필록세라였다. 700여 개나 되던 와이너리가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될 무렵에는 160여 개로 줄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와이너리에서는 금주법에서 예외로 허용한 종교용 와인과 의사 처방 없이 판매할 수 있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강장제용 와인을 만들거나 가정용 와인을 위한 포도를 생산하며 그 시기를 버텼다.
금주법 폐지 이후 다시 포도나무 재배지가 늘고 많은 양의 와인이 생산됐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는 달콤한 주정 강화 와인과 저그 와인(항아리 모양의 큰 병에 담긴 저가의 대중용 와인)이 대부분이었다.
미국 와인의 젖줄 '몬다비가(家)'
1861년 나파밸리에 최초로 설립된 찰스 크룩 와이너리는 이 모든 역사를 거쳤다. 1943년 이 와이너리를 사들인 사람이 이탈리아 이민자 체자레 몬다비(로버트 몬다비의 아버지)다. 그는 금주법 당시 캘리포니아 로다이에서 가정 양조용 포도와 농축 포도즙을 팔아 큰돈을 벌었다. 와이너리를 인수한 후로는 나파밸리로 옮겨 와 로버트와 피터 두 아들과 함께 가족 와이너리를 운영했다.
몬다비 가족은 대중적인 저그 와인을 생산하면서도 고급 취향의 품질 와인도 만들었다. 실력있는 와인메이커 앙드레 첼리스체프가 자문을 맡았고 나파밸리 최초로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와인을 숙성했다.
몬다비 가족의 노력이 통했는지, 이들의 와인은 케네디 대통령과 이탈리아 정상의 만찬 와인으로 선정되었다. 로버트 몬다비 부부는 가족을 대표해 백악관에 초대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케네디가 암살당하면서 일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로버트 몬다비의 혁신
한편 가족 사업이 잘됐지만 몬다비 형제는 다툼이 잦았다. 결국 둘의 관계는 극으로 치달았고, 로버트 몬다비는 가족 와이너리에서 독립해 1966년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Robert Mondavi Winery)를 세웠다.
로버트는 품질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양조 시설이 좋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962년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 독일 모젤, 이탈리아의 와인 명산지를 두루 다니며 얻은 결론이었다. 그는 온도조절이 가능한 스테인리스스틸 탱크 등 최신 설비를 나파밸리에 최초로 들여왔다. 고품질 와인을 숙성시킬 프랑스산 작은 오크통도 구비했다. 하지만 도구보다 장인이 중요했으니, 그는 미엔코 마이크 그르기치와 워렌 위니아스키 같은 최고 실력의 양조 인재를 채용했다. 이들이 바로 훗날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우승한 화이트와인 샤토 몬텔레나와 레드와인 스택스 립 와인셀라를 만들었다.
로버트는 와이너리 본관 건물도 멋들어지게 신축했다. 테이스팅 룸을 비롯한 부대시설을 마련해 와인에 음식과 예술을 결합해 관광객을 끌어모았다. 오늘날 미국 와이너리들은 한결같이 투어 프로그램으로 부수입을 올리면서 동시에 와인을 홍보하고 있다. 모두 로버트의 선구안 덕분이다. 게다가 그는 품질 높은 화이트 와인을 만들기 위해 저온 발효를 시도했다. 독자적인 와인병을 고안하고 PVC 포일 사용을 줄이는 등 환경보호를 위해서도 앞장섰다. 이 모든 과정이 신세계 와인의 탄생을 알린 와인 역사의 독립선언인 셈이다.
미국 와인에는 프랑스 등 구세계 와인과 구별되는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미국 품질 와인은 레이블에 ‘포도 품종’을 표시한다. 로버트 몬다비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로버트 몬다비 ‘샤도네이’처럼 말이다.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선도한 사람이 로버트 몬다비다. TMI(과도한 정보)이지만, 레이블에 품종을 표시하려면 75% 이상 해당 품종을 사용해야 한다.
둘째, 미국에는 레이블에 상표명을 단 ‘메리티지’ 와인이 있다. Meritage는 ‘merit’와 ‘heritage’를 합한 말로, 미국에서 재배한 보르도 품종을 사용해 보르도 블렌딩 방식으로 만든 고급 와인에 이 명칭을 붙인다.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와 샤토 무통 로칠드가 합작해 만들어 1979년 출시한 ‘오퍼스 원(Opus One)’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로버트 몬다비는 여러 나라 와이너리와 합작해 명품 와인을 만들었다. 이탈리아 프레스코발디 가문과는 루체(Luce)를, 칠레 에라주리스 사와는 세냐(Seña)를 탄생시켰다.
셋째, 미국에는 ‘퓌메 블랑’이라는 와인이 있다. 이 와인은 소비뇽블랑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으로 처음에는 품질이 낮아 인기가 없었다. 로버트는 소비뇽블랑을 오크통에 숙성시켜 부드러우면서도 특색 있는 와인을 만들었다. 이름도 퓌메 블랑으로 바꾸었다.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서 부르는 소비뇽블랑의 별칭인 ‘블랑 퓌메’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러자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는 이 명칭을 상표등록 하지 않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카피레프트인 셈이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또다시 필록세라가 발생했다. 재차 닥친 위기를 캘리포니아 와인 업계는 외려 기회로 삼았다.
먼저, 포도나무를 뽑아내고 포도밭을 다섯 기후 지역으로 구획해, 각 구역에 가장 적합한 품종을 심었다.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 캠퍼스의 앨버트 J. 윙클러와 메이너드 에머린 교수의 논문을 따른 것이다. 포도나무 간격, 재식 방식과 밀도는 물론 관계시설도 현대식으로 바꿨다. 당장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길게 보면 와인 품질을 높일 수 있는 포석이었다.
로버트 역시 포도밭마다 가장 적합한 품종을 심었다. 또 테루아르(포도밭을 둘러싼 자연 환경) 특성을 반영한 와인을 생산하도록 시설도 개조해 위기를 극복했다. 그는 이후 ‘미국 와인 식품 예술 후원센터’를 설립했고,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 캠퍼스에 재산을 기부해 ‘로버트 몬다비 와인과 식품 과학연구소’를 열었다. 더불어 ‘로버트 몬다비 공연예술센터’도 개관했다.
와인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와이너리 최초로 나스닥에 상장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과감한 투자와 예측이 어려운 주가 탓에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는 2004년 컨스털레이션(Constellation)사에 매각되었다.
와인 컨설턴트 빅 모토는 로버트 몬다비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그냥 대단한 와인을 만든 게 아니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나파밸리 와인이라는 ‘분야’를 창조했다.”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거장 로버트 몬다비는 2008년 9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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