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혁·전현희 사퇴 종용에 블랙리스트 수사도
민주 "대통령 바뀌면 다 그만두자" 플럼북 제안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과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의 거취를 놓고 갈등이 커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최근 국무회의에 두 위원장을 부르지 않으면서 논란이 시작되더니 최근에는 여당이 앞장서 “철학도 맞지 않는 사람 밑에서 왜 자리를 연명하냐”며 연일 사퇴 압박을 가하고 있다. 야당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정무직 임기를 존중하는 관행이 굳어졌는데 정권이 바뀌니 여당이 내로남불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임기 있는데" "나가라" 반복되는 갈등
전 정부 시절 임명된 두 위원장의 거취 논란은 중간 타협책을 찾기 어려운 형국으로 꼬이고 있다. 17일엔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 두 사람의 버티기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내비쳤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선) 다른 국무위원이 마음에 있는 얘기를 툭 터놓고 비공개 논의도 많이 한다”며 “굳이 올 필요 없는 사람까지 다 배석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임기가 보장된 자리인 만큼 직접 물러나라 할 수는 없지만, 사실상 사퇴를 우회적으로 압박한 것으로 보인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문재인 대통령 철학에 동의해 그 자리에 있는 거지, 윤석열 대통령의 철학에 동의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철학도 맞지 않는 사람 밑에서 왜 자리를 연명하느냐”고 비판했다.
이처럼 정권 말 ‘알박기’ 인사와 이들을 물러나게 하려는 새 정권 사이의 갈등은 윤석열 정부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에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전 정권에서 임명된 산하기관 임원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했다가 직권남용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있었다. 최근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의 재판이라 할 수 있는 산업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불거져 수사가 진행 중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건 모두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수사다. 문제는 전 정부가 정무직 임기를 보장하지 않고 물러나게 한 직권남용 행위와, 현 정부가 방통위원장과 권익위원장을 상대로 벌이는 공개적인 사퇴 촉구 행위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느냐다.
野, "제도 개선 논의하자", 與 "여당일 때 뭐하고… 진정성 의심"
여야가 입장이 바뀔 때마다 공수를 교대하는 소모적 상황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여야 가운데선 정권 교체 이후 퇴진 압박 대상이 된 야당이 그런 문제의식이 더 강하다.
우상호 민주당 비대위원장은 “한쪽으로는 수사를 하고 한쪽으로는 그만두라는 압력을 넣는 모순된 행동이 문제”라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제도 개선을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박재호 민주당 비대위원도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다 함께 그만둔다는 법을 만들어 정리해야 한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당은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문제의식이 있다면 민주당이 여당이던 지난 정권에서 제도를 개선할 수 있었음에도 손 놓고 있다가 공수가 바뀐 뒤에야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임기 말 ‘알박기’ 인사를 해 놓고 정권이 바뀌니 제도 개선을 하자는 게 진정성이 있느냐”라며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은 사적 영역에도 속하는데 이를 규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권 철학 구현할 자리' 리스트 만들어야
결국 여야 모두 정쟁으로 접근해선 문제를 풀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대승적 차원에서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매번 정권 교체 시기마다 벌어지는 일인 만큼 대통령과 주요 고위직 공무원의 임기를 맞추거나, 아니면 국정철학에 따라 일할 필요가 있는 자리를 선정해 정권이 바뀌면 새 대통령에게 임면권을 주자는 것이다. 이를 투명하게 처리하기 위한 대안으로 미국식 ‘플럼북’도 거론된다.
미국에선 대선 후 차기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행정부, 공공기관 직책 리스트와 자격 요건을 규정한 플럼북을 공개한다. 정식 이름은 ‘미국 정부 정책 및 지원 직책’ 보고서이지만, 표지가 자두색이어서 플럼북(Plum Book)이란 별칭이 붙었다.
미국처럼 세세한 자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책을 구현해야 하는 자리는 대통령의 권한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나온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는 임기를 보장하는 방향이 맞지만, 기관 특성상 전문성보다 정부 철학과 얼마나 일치하는지가 더 중요한 곳이 있지 않겠냐”면서 “이런 자리에 대한 임기를 규정하는 제도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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