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여사, '팬클럽 정치' 국민 소통...정치권 우려
美 '국민과 소통 달인' 영부인 그린 '더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베티 포드·미셸 오바마 공통점은
"신문·TV·소셜 미디어 적극 활용, 국민 소통"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다. 최근 영부인으로서 행보가 두드러지면서 언론은 물론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역대 영부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국민과 소통하려는 방식이 좀 색다르다. 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 미디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아닌 '팬클럽'을 이용한 방식이 그렇다.
국민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목적이었을까. 하지만 정치권 안팎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대통령실에서 제공하지 않은 미공개 사진이 팬클럽을 통해 공개되자, "영부인 동선 공개가 국가안보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염려했다. 또 팬클럽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김 여사의 사진을 게재하는 강신업 변호사의 언행도 구설에 오르고 있다.
국민과 소통하려는 '팬클럽 정치'가 오히려 부작용만 낳고 있는 셈이다. 야권은 물론이고 여권에서도 "팬클럽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어쩌면 대선 과정에서 "청와대 제2부속실을 폐지하겠다" "영부인이란 말 쓰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의 공약이 김 여사로 하여금 '팬클럽 정치'로 옮겨가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건 김 여사의 소통하려는 의지다. 그래서 '제2부속실 부활' 가능성이 커졌다. 국민과의 소통도 고도의 전략과 대비를 통해 완성될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난 4월 미국에서 방영된 TV드라마 '더 퍼스트 레이디(The First Lady)'는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는 세 명의 영부인이 나온다.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베티 포드 여사, 그리고 미셸 오바마 여사다. 수십 년을 관통한 이들에겐 운명적이게도 공통점이 있다. 바로 국민과의 소통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 그래서 미국 역사는 이들에게 "국민과 소통의 달인"이라고 칭송한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갔던 걸까.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이 발행하는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에 기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세 명의 퍼스트 레이디를 조명해봤다.
신문과 라디오로 대중과 소통했던 엘리너 루스벨트
미국 역사상 가장 대중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퍼스트 레이디를 꼽으라면 단연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국민을 위로하면서 미국을 재건하는 데 노력한 여인이다. 그래서 1933~45년까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적극 보좌하면서 세 차례의 임기를 지켜냈다.
루스벨트 여사는 행동파였다. 대중과 소통하려는 욕구가 깊었기에 직접 발로 뛰거나 글로 표현하며 적극적인 행보를 했다. 당시의 언론들은 그가 남편의 첫 임기 당시 "연간 평균 4만 마일을 주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루스벨트 여사의 전기 '엘리너'를 집필한 작가 데이비드 마이클리스는 "여사는 백악관에서 차를 따르는 대신 차를 타고 전국을 누볐고, 종종 혼자 운전해 예고 없이 동료와 시민들을 만나 시련을 듣고 도움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라디오 방송과 신문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는 데 애썼다. 그는 수백 개의 주간 라디오 쇼를 주최하고 정기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일간 신문에 칼럼도 기고했다. 특히 '마이 데이(My Day)'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은 1935년부터 1962년 11월까지 그가 눈을 감기 몇 달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독자들과 만났다. 매일 백악관에서 느끼는 진솔한 감정을 적으며 국민에게 다가갔다.
대중과 소통하려는 루스벨트 여사의 의지는 전쟁통에도 이어졌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포탄을 맞고 장애인이 된 병사들을 위해 병문안을 다니는 데 전념했다. 정치적 행보였다면 언론의 시선이 중요했을 테지만, 그의 주변에는 카메라를 든 직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은 "대중과의 소통 욕구는 루스벨트 여사에게 과시를 위한 것도, 정치적인 점수를 얻기 위해 계산된 행동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TV 앞에 나서 대중을 사로잡은 베티 포드
1974년 갑작스럽게 백악관의 안주인이 된 베티 포드 여사는 영부인의 역할을 정립시킨 전설적인 인물이다. 심지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임기 중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후임인 남편 제럴드 포드 대통령보다 더 유명세를 탔다. 비록 3년이라는 짧은 백악관 생활을 마쳤지만 말이다.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은 대장부 스타일이었다. 영부인이 된 지 불과 26일 만에 백악관 스테이트 다이닝 룸에서 142명의 기자들을 초청해 첫 기자회견을 열었다. 9개월 만에 국회의원의 아내에서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됐지만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첫 기자회견 내용도 '평등권 수정안' 비준을 돕는 게 자신의 우선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발표였다. 이뿐만 아니라 낙태법 합법화 등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즉각 해명하며 떨어진 백악관의 권위를 되찾으려 애썼다.
그의 행보는 분명 과거 영부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포드 여사의 전기 '베티 포드: 영부인, 여성 옹호자, 생존자, 개척자'의 저자 리사 맥커빈은 "포드 여사는 기자들과 막말을 주고받는가 하면 어려운 질문을 피하는 걸 거부했다"면서 "남편이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전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낙태와 마리화나, 여성의 권리 등 민감한 사안에 가감 없이 의견을 냈다. 미국 역사상 그 어떤 영부인도 행동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캐서린 젤리슨 오하이오대 교수 겸 여성연구학자는 "포드 여사는 영부인의 역할에 솔직함과 즉각성이라는 새로운 감성을 부여했다"고 평가했다.
TV 토크쇼에 출연한 포드 여사의 솔직함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는 1975년 '60분(60 Minutes)'에 출연해 낙태법 합법화에 대해 이야기하던 도중 "딸이 외도할 경우에도 놀라진 않을 것"이라고 말해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불어 젊었을 때 마리화나를 접했었다면 "아마도 시도했을것"이라는 말도 논란이 됐다.
비평가들은 포드 여사의 너무나 솔직한 발언에 "무미건조하고 외설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대중의 생각은 달랐다. "진정 현대적으로 솔직한 영부인"이라는 평가로 위상을 확고히 했고, 대중의 호평 속에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포드 여사에게 솔직함이란 국민 앞에 숨기는 게 없다는 의미였다. 그는 유방암으로 유방절제술을 받은 사실까지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만 해도 유방암은 그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로 금기시된 질병이었다. 하지만 포드 여사는 자신의 상태를 기자회견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렸다. 여성들에게 유방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조기 발견율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포드 여사의 솔직한 소통법은 백악관을 위한 모험이었다. 포드 여사는 1984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워터게이트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은폐가 있었기 때문에 포드 행정부에선 은폐가 없을 거라고 확신을 보여줘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유방암에 대한 전통적인 침묵을 깨고 공개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후에 포드 여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포드 여사가 미국 문화에 끼친 영향은 불과 896일 동안 재임한 남편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그중 상당 부분이 대통령 집무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소비됐다."
소셜 미디어로 소통한 그녀, 미셸 오바마
"미셸 오바마는 소셜 미디어를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신중하게 선별해 활용하는 정통한 디지털 시민이다."
2015년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미셸 오바마 여사를 이렇게 정의했다. 40대의 젊은 영부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을 능숙하게 이용할 뿐만 아니라 유튜브, 바인(Vine, 6초 정도의 짧은 동영상 공유 서비스 앱) 및 프리스코프(Periscope, 트위터에서 제공하는 iOS 및 안드로이드용 비디오 생중계 스트리밍 앱)도 거부감 없이 사용했다.
그래서 미국 사회는 미셸 오바마를 향해 소셜 미디어 사용으로 영부인의 역할을 재창조한 퍼스트레이디로 꼽는다. 그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젊은 대중과 소통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이 진행하는 캠페인에 이를 적극 활용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렛츠 무브!(Let's Move!)' 운동이다. 그는 2013년 코미디언 지미 펠론의 토크쇼 '나이트쇼'에서 펠론과 함께 춤추는 모습을 선보였다. '춤을 추는 엄마'를 주제로 영부인은 펠론과 기꺼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대중에게 다가갔다. 권위 따윈 없었다.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고, 이를 드러내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오바마 여사가 아닌 '오바마 부인'이 된 순간이었다.
이후 아동 비만 근절 캠페인의 일환으로 2분가량의 '에볼루션 오브 맘 댄싱'을 촬영해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삽시간에 입소문이 퍼졌고 트위터 등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면서 당시 5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렛츠 무브!' 캠페인은 소셜 미디어에서 오바마 여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상당했는지를 보여준다. 2014년에는 바인에 올린 7초짜리 영상이 폭발적인 반응으로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여사는 이 영상에서 손에 순무를 들고 당시 인기곡인 릴 존의 '턴 다운 포 왓'을 따라 불렀다. 짧은 영상은 하루에 6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올리며 젊은 층에게 어필했다.
그가 시작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셜 미디어 운동 중 하나는 '렛 걸즈 런(Let Girls Learn)' 캠페인이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전 세계의 6,200만 소녀들이 학교에 가고, 학교에 남을 수 있도록 돕는 운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62MillionGirls'라는 해시태그를 사용해 캠페인을 이끌었다. 켈리 클락슨 등 유명 가수들이 이 캠페인에 동조하며 '디스 이즈 포 마이 걸즈(This Is For My Girls)'라는 공연을 통해 소녀들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사의 선한 영향력이 소녀들을 위한 또 다른 운동으로 확장된 것이다.
미 언론들은 오바마 여사의 '소셜 미디어 정치'는 매우 성공적이라고 호평한다. 그것은 소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진정성 있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당시 그의 '소셜 미디어 정치'를 모범 삼아 '미셸 오바마처럼 소셜 미디어를 활용해 성공하는 방법' 등의 기사가 쏟아졌겠는가.
오바마 여사는 소통하기 위해 젊은 세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2016년 뉴스 웹사이트인 더 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는 심야 뉴스를 보지 않고, 신문을 읽지 않으며 일요일 아침 쇼를 보지 않는다"며 "그들은 휴대폰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며 국민과의 소통 방식을 찾는 데 많은 노력을 들였다고 강조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