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블록버스터 '헤일로'서 부각된 한국인 정체성
할리우드 "진짜 한국 이야기 찾는다"
'파친코' '서울 걸스' '아메리칸 서울' 등 줄줄이 제작
식민, 분단, 이민 등 한국 역사, 드라마 보편적 주제와 맞닿아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거액을 투자한 할리우드 드라마에서 한국어와 한국계 배우, 한국 이야기를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할리우드 영화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직접 제작한 SF 드라마 '헤일로'에선 한국계 배우와 한국어 대사는 극의 주요 기둥이다. 애플TV+가 한국의 식민지 역사와 재일 조선인의 삶을 정면으로 다룬 '파친코'를 3월 선보인 데 이어 또 다른 미국 OTT '훌루'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이 서울로 건너가 벌어지는 일을 다룬 드라마 '아메리칸 서울'을 제작하고 있다. 미국의 주류 콘텐츠 제작 및 유통사들이 한국 이야기 발굴에 열을 올리면서 할리우드가 '한류 전도사' 내지 '한류 공장'이 된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이런 변화는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 인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식민지 경험과 이민, 고도 성장과 계층 갈등 등 한국의 근현대사에 응축된 상처와 영광의 이야기 자체가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주제여서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현대 드라마의 주요 주제인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미국 작가가 한국어 대사 원해"
"아빠, 아빠 숲에 있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나서" "진정해라 몇 명이야?"
국내 OTT 티빙 내 파라마운트관에 공개된 SF 드라마 '헤일로' 1화에서 관 하(하예린)와 진 하(공정환)가 한국어로 나누는 대화다. 지구 밖 마드리갈 행성에 사는 두 한국계 부녀의 대화는 외계 종족이 습격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18초 동안 이어진다. 이뿐만 아니라 드라마 곳곳에서 한국어가 등장해 배역의 한국적 정체성을 부각한다.
이 드라마를 제작한 스필버그가 한국계 배우를 기용해 한국어 대사를 내보내기는 처음이다. 총 9회인 이 드라마 제작비는 약 9,000만 달러(1,162억 원). 블록버스터에 주역으로 출연한 하예린은 손숙의 손녀로 한국계 호주 배우고 공정환은 한국인 배우다. 최근 화상으로 만난 하예린은 "작가(스티븐 케인)가 일부 대사를 한국어로 쓰고 싶어 했다"며 "가령 '오 마이 갓'이란 영어 감탄사에 대해 '이건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하니?' 묻고 '세상에' 식으로 알려주면, 작가가 '너흰 왜 신을 안 찾니' '왜 이렇게 짧니'라고 되물으면 그걸 나와 공정환 선배가 설명하는 식으로 해서 한국어 대사에 우리 둘이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훌루 '아메리카 서울' 제작..."진짜 한국이야기 찾고 있어"
훌루가 제작하는 '아메리카 서울'은 미국에 살던 한인 여성 입양인이 서울로 가 일을 하던 중 자신이 왕조 혈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이동훈 엔터미디어 콘텐츠 대표는 한국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대본을 쓰고 있는 상황"이라며 "'파친코'처럼 한국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민자 스토리이기도 해 해외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재"라고 말했다. 그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한국 이야기는 미국 시장에서 외면당하기 일쑤였다"며 "'오징어게임'과 '파친코'의 연이은 성공을 계기로 할리우드는 한국어 비중이 높고, 한국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대본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애덤 스타인먼 워너브러더스 인터내셔널 TV프로덕션 부사장은 한국콘텐츠진흥원 미국 로스앤젤레스 비즈니스센터를 통해 "예전엔 '굿닥터'처럼 한국 드라마를 미국 시장에 맞게 각색해 리메이크하려 했다면, 요즘엔 '진짜 한국 이야기'를 찾고 있다"고 전했다.
'진짜 한국 이야기'는 식민 지배와 이민, 분단에다 독재와 민주화 등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겪었던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한국적 성공담 안에는 여러 상처와 모순, 갈등이 함축돼 있어 한국만의 이야기에 그치는 게 아니다.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의 전 세계적 인기에서 드러나듯 '진짜 한국 이야기'가 드라마의 보편적 주제와 맞닿아 있다는 뜻이다. 역사에서 지배 국가였던 중국과 일본이 아닌 한국 이야기가 해외 시장에서 주목받는 이유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글로벌 OTT에 핵심 시장은 미국과 더불어 아시아"라며 "한국의 이야기는 식민 생활을 경험하고 이방인처럼 여겨지는 세계 여러 이민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화이팅 워싱'(할리우드에서 다른 인종 캐릭터에 백인을 캐스팅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시장에서 더욱 힘을 얻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기류 속에서 현지 제작사뿐 아니라 할리우드 배우도 '한국 이야기 산파'로 나서고 있다. 영화 '어쩌다 로맨스'(2019)로 국내에 친숙한 미국 배우 레벨 윌슨은 K팝 영화 '서울 걸스'를 이르면 올해 선보일 예정이다. 영화는 K팝 그룹 오프닝 공연을 맡을 가수를 뽑는 자리에 한국계 미국인 여고생들이 참가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국내 OTT와 손잡는 '골리앗'들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글로벌 OTT들이 국내 시장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과 드라마 CSI 시리즈 등을 제작한 파라마운트픽처스의 OTT인 파라마운트 플러스는 국내 OTT인 티빙을 통해 16일 한국에 상륙했다. 파라마운트 외에 미국 워너브러더스디스커버리 OTT인 HBO맥스도 국내 OTT(웨이브)를 통한 올하반기 국내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 넷플릭스처럼 직접 진출보다 국내 경쟁력 있는 OTT와 손을 잡는 방식이다. 국내 업체와의 협업을 통해 진입 장벽이 높은 한국 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한류 콘텐츠를 더 확보해 해외 시장에서 새로운 구독자를 유입하려는 전략이다. 한류 콘텐츠를 보유한 국내 업체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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