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감독상 박찬욱 신작... 29일 개봉
상투적인 듯하면서도 새롭다. 고전의 향취를 지녔으면서도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지난달 제75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헤어질 결심’은 오랜 틀을 가져와 진일보한 영화세계를 펼쳐 낸다.
이야기 줄기는 전형적이다. 부산 지역 엘리트 형사 장해준(박해일)과 중국인 여인 송서래(탕웨이)가 중심인물이다. 장해준은 변사 사건을 담당한다. 산에서 추락사한 중년 남자에 대한 수사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사고사인지 알 수 없다. 피해자의 아내 송서래(탕웨이)가 용의자로 꼽힌다. 해준은 서래에 마음을 뺏긴다. 그는 서래의 행적을 쫓는다. 수사인지 스토킹인지 불분명하다. 서래는 무혐의 처분을 받고, 해준은 서래와 금지된 사랑을 나눈다. “(사건의 실체를) 언제나 똑바로 보려고” 했던 최연소 경사 해준의 남다른 이력은 ‘부서지고 깨어질’ 위기에 처한다.
1940~50년대를 풍미했던 필름 누아르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줄거리다. 성실했던 남자(주로 사립탐정이나 형사다)가 매혹적인 여자를 만나 파멸에 이르는 것. 필름 누아르 영화의 전형적인 내용이다. 필름 누아르 속 남자는 팜 파탈이라는 위험한 여자에 포획된, 운명의 가혹한 희생물이다.
‘헤어질 결심’은 전형적인 이야기를 끌어와 전형성을 벗어난다. 영화 전반부까지 서래는 가부장제적 통념에서 비롯된 팜 파탈이다. 남자를 파멸에 몰아넣는, 악마적 존재다. 후반부는 다르다. 서래는 주체적 여성이다. 남자에 종속되지도, 재물이나 자신의 안위라는 욕망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사랑을 위해 자신만의 선택을 한다. 해준 역시 다르다. 필름 누아르의 여느 남자들과 달리 폭력적 남성성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품위와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예의 바르다.
고전영화 팬이라면 여러 장면에서 옛 영화들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높은 곳(산)과 바다의 대조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1959)을 떠올리게 하고, 해준이 망원경으로 서래를 감시하는 장면은 ‘이창’(1954)을 닮았다. 한 남자가 산에서 의문사하고, 그의 아내가 용의자가 된다는 설정은 일본 감독 마스무라 야스조의 명작 ‘아내는 고백한다’(1961)를 연상시킨다.
여러 영화들이 어른거리나 ‘헤어질 결심’은 고전의 단순한 짜깁기가 아니다. 창의적인 장면 연출로 자신만의 인장을 스크린에 남긴다. 모든 장면들이 새롭다. 해준이 서래를 취조하는 모습을 유리와 감시 모니터 등으로 분할해 보여주며 두 인물의 심리와 감정을 면밀히 포착해내는 장면 등은 영화학도라면 교본으로 삼을 만하다. 스릴러의 서늘함과 로맨스물의 애틋함, 냉소적 유머를 교차시키는 능숙한 연출력이 이전 영화들에선 쉬 느낄 수 없었던 정서를 빚어낸다. 청색(바다)과 녹색(산)이 섞인 청록을 내세워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흥미롭기도 하다. 청록은 서로의 진심이 달라서, 또는 진심을 못 알아차려서 엇갈리는 해준과 서래의 애정관계를 표현한다. 세상 일(특히 사랑)은 용의자와 형사의 관계처럼 이분법으로만 접근할 수 없다는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박 감독은 전작들보다 생략과 절제를 보여준다. 해준과 서래가 격정적 사랑에 빠져도 침실 장면을 묘사하지 않는다. 서래가 아이스크림을 탐닉하는 장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을 서래가 재워주는 모습 등 직설보다 은유를 택했다. 여러 차례 살인이 일어나나 잔혹한 살해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감추고 에두르기에 결말부 비장미의 여운이 더 진하다.
필름 누아르 명작 ‘명탐정 필립’(1946) 등을 남긴 할리우드 명장 하워드 호크스(1896~1977)는 좋은 영화를 이렇게 정의했다. “걸출한 장면은 세 개가 있고, 나쁜 장면은 하나도 없는 영화.” ‘헤어질 결심’에도 충분히 해당할 만한 말이다. 2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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