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힐(Ray Hill, 1939.12.2~ 2022.5.14)
영국인 ‘노동자’ 레이 힐(Ray Hill, 1939.12.2~2022.5.14)의 삶은 크게 5단계로 나뉜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를 중퇴하고 거친 거리의 싸움꾼으로 성장한 청소년기.
-군 제대와 결혼 후 버스 차장 등 온갖 노동으로 돈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자 분투의 시기
-극우 이념에 사로잡혀 네오나치 단체 활동가로 살았던 30,40대 20년 세월.
-공개적으로는 극우파 리더로 살면서 은밀히 조직의 비밀을 언론에 폭로해 여러 조직을 내파시킨 ‘변절-전향’의 5년
-자신의 부끄러운 진실과 극우의 추한 진실을 고백-폭로하고, 극우 이념에 취약한 사회 특히 청년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 바친 여생.
힐의 드라마같은 삶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그가 글과 말로 먹고산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극우 활동가로 사는 동안에도 늘 몸으로 가정을 부양한 노동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옳다고 여긴 바, 저 광역의 이념 지대를 가로질렀다. 말년의 그는 '칠면조에게 크리스마스에 표를 주라(ask turkeys to vote for Christmas)'고 설득하는 것으로는 결코 정치적 극단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hiding to nothing)'고 말하곤 했다. 공적인 해악을 알면서 극단주의를 선동하는 이들에게 극단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의미,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바에 동조하라는 요구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였다. 대신 그는 이렇게 주문했다. “(한때의 나처럼)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 계급이 극우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그들에게 영감의 리더십과 진정한 열망, 무엇보다 희망을 위한 기회의 평등을 약속하는 주류 정치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칠면조에게 크리스마스에 표를 주라'고 설득하는 것으로는 결코 정치적 극단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레이 힐
영국이 2차대전 전후 약 15년 만큼 이민자들에게 너그러웠던 때는 드물다. 영국은 갓 독립한 ‘신영연방’ 즉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 출신이면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영국 국적을 부여했고, 딴 나라 출신이어도 7년 이상 영국에 거주하며 영어에 능숙하고 범죄 전과가 없으면 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연방 내 종주국 지위와 영향력을 유지하고, 전후 노동 인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신영연방 신규 이민자는 1959년 2만1,550명, 이듬해 5만8,300명, 61년 12만 5,400명으로 매년 폭증했다.
반면 국가 경제는 전쟁 부채 등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그나마 50년대에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인프라와 공장 등 전쟁 피해가 적어 고용과 소비 증가로 버틸 만했지만 50년대 말부터 이른바 ‘영국병’이라 불리게 되는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심화하고, 독일-일본 등과의 수출 시장 경쟁에서 고전하면서 전통 제조업이 휘청대고 노사갈등이 심화했다.
불황과 경기침체의 압박을 가장 첨예하게 받는건, 늘 그렇듯 저소득 노동자 계층이었다. 그들의 궁핍과 불안을 이민자 탓으로 돌림으로써 분노를 조직화하는 '극우 정치'가 더불어 본격화했다. 더욱이 당시 주류 이민자는 2차대전 이전의 아일랜드계 백인들과 달리 아시아계 '논 화이트(Non-White)'였다.
보건장관을 지낸 보수당 정치인 이녹 파월(Enoch Powell, 1912~1998)이 당 전당대회장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여과없이 표출한 이른바 ‘피의 강물(Rivers of Blood)’ 연설을 한 게 68년 4월이었다. 그는 “영국이 천년 역사상 유례없는 격변을 맞이하고 있다(…) 이민자들이 영국을 파괴하고 있다”며, ‘내 눈에는 피로 흘러 넘치는 테베레 강이 보인다’ 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를 인용했다. 저 인종주의 연설로 파월은 보수당 그림자 내각에서 배제됐지만, 상당수 노동자들은 그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고 두 달 후 총선에서 보수당은 승리했다.
영국 의회와 정부는 62년과 68년 영연방이민자법과 71년 이민법 개정을 통해 이민 규제를 점차 강화했다.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Leicester)의 만 27세 노동자 레이 힐도 67년 ‘반이민협회(AIMS)'에 가입하면서 극우의 파도에 휩쓸렸다.
그는 영국의 '러스트벨트'라 할 만한 랭카셔(현 그레이트 맨체스터) 모슬리(Mossley)의 양모공장 노동자 아들로 1939년 태어나 애슈턴(Ashton)에서 성장했다. 훗날 그는 "모슬리도 거친 동네였지만, 중학교 시절을 보낸 애슈턴은 거의 전쟁터였다"고, “아이들과 주먹질하는 게 거의 일상이었”고, 학교에서도 교사들에게 매맞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졸업장도 기술자격증도 하나 없이 학교를 중퇴한 그는 하지만 온갖 공장을 전전하며 노동으로 생계를 도모했고, 복싱장 스파링 아르바이트로도 돈을 벌었다. 싸움꾼인 그가 용케 ‘뒷골목’으로 빠져들지 않은 데는 틈만 나면 책 읽기를 좋아했던 덕도 있을 것이다. 그는 독학하는 습관 덕분에 자신이 지적으로 각성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평생 그 습관을 유지하고자 애썼다고 말했다.
3년 군복무 후 자신의 딸을 임신한 웨이트리스(Glennis Shapcott)와 66년 결혼해 레스터의 가난한 동네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혼자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게 당시 그에겐 무척 버거웠다고 한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도 시달렸다. 그런 그에게 솔깃하고 강렬한 유혹이 찾아왔다. ‘모든 게 이민자 탓’이라는 극우의 꼬드김이었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 “당신의 불행이 모두 다른 누군가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인종 편견은 가장으로서의 위신을 세우는 동력이 된다. 가난과 고통은 더 이상 내가 못난 탓이 아니다. 모든 원인은 이민자들에게 있고, 이민자와 싸우는 것이야말로 내 가정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썼다.
그는 신념의 활동가이자 열정적 웅변가였다. 68년 더 규모가 큰 극우단체(국민보존협회, RPS)로 옮겨 60년대 영국 네오나치의 거물 콜린 조던(Colin Jordan, 1923~2009)을 만났다. 힐은 콜린이 68년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은 전국 규모의 극우 단체 ‘브리티시무브먼트’(BM, 초대회장 콜린 조던)의 레스터 시 지부장이 됐다. 조던이 이듬해 버밍엄 하원 보궐선거에 출마(낙선)했을 땐, 보디가드 겸 핵심 참모로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아내 글레니스는 점점 변해가는 남편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대체로 참아줬다고 한다.
69년 말 그는 한 유대인 카페 주인을 폭행해 상해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그리곤 경찰 조사를 피해, 가족과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치듯 이주했다. 영연방인 남아공에도 극우 인종주의 네트워크는 존재했고, 힐은 공장 노동자로, 소방수와 버스 차장, 보험 판매원 등으로 일하며 남아공국민전선(SANF) 핵심 멤버로 활동, 78년 의장이 됐다. 의장 시절 그가 주도한 캠페인 중 하나가 남아공의 대표적인 아파르트헤이트 법 중 하나인 ‘집단지구법(Group Areas Act, 1950)’ 즉 인종별 이용-거주지역 구분 법률을 보다 엄격히 집행하라는 거였다.
79년 그는 요하네스버그 힐브로(Hillbrow)지구의 한 인도인 이민자 가족이 경찰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은 걸 본다. 자신과 SANF의 캠페인 탓이었다. 이민자로서 남아공에 정착해 사는 동안, 그의 가족도 유대인 등 여러 '이등'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고, 인종차별과 비백인의 비참을, 그들의 인권-저항운동을 보고 겪은 터였다. “창자가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 일가족이 당한 일이 나 때문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어디에도 갈 곳 없이 거리에 내몰린 그 불쌍한 가족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바로 내가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는 자각 때문에 그 단순한 인간적 동정조차 할 수 없었다.(…) 한없이 부끄러웠다.(…) 인종주의자로서의 나의 삶이 그렇게 끝이 났다.” 몇 달간 번민하던 끝에 그는 아내와 셋으로 불어난 아이들과 함께 10년 만에 레스터로 귀향했다. 2015년 인터뷰에서 그는 "인간적인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이라면 남아공에서 10년을 머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혐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끔찍했다. 끔찍함 그 자체였다"고도 말했다.
영국 노동당계가 창간한 대표적 반파시즘 탐사보도 월간지 ‘서치라이트(Searchlight)’에 80년 초부터 익명의 제보전화가 잇달아 걸려오기 시작했다. 레스터 지역 극우파 활동 계획서부터 82년 극우 국민전선(NF)의 파생 정당으로 출범한 ‘브리튼국민당(BNP)’ 당원 명부까지 알짜배기 정보가 수두룩했다. 제보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레이 힐이었다. 귀국 직후 극우활동을 재개해 BM 부위원장으로 일했고, BNP 창당 멤버로 당수 존 틴덜(John Tyndall)과 나란히 창당 행사장 단상에 앉았던, 바로 그였다.
대외적으로 그는 누구보다 '악질적인' 극우파 리더였다. 싸움꾼 출신으로 BM 조직 내 강성 ‘스킨헤드’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던 그는 ‘BNP 창당과 극우조직 통합’ 을 명분으로 BM 리더였던 마이클 맥로린(Michael McLaughlin)에게 맞서 조직을 와해시켰고, 82년 6월 BBC 라디오쇼 ‘Any Questions?’의 반 극우 공개방송 현장에 당원들을 이끌고 난입해 극우 구호를 외치며 방송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83년 BNP 후보로 레스터 서부지역 총선에도 출마(낙선)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서치라이트’의 누구도 제보자의 신원을 알지 못했고, 극우 진영의 누구도 그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힐의 제보 덕에 81년 이탈리아 볼로냐, 프랑스 파리, 독일 뮌헨 등지에서 잇달았던 극우 폭탄테러의 배후 즉 유럽 네오나치 네트워크가 드러났고, 여러 건의 무기 밀거래 현장이 적발됐고, 81년 런던 노팅힐 페스티벌 폭탄테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극우파 테러리스트들의 영국 내 비호-은신 네트워크를 적발한 것도 그의 제보 덕이었다. 극우파 리더로서 음지에서 저 활약을 펼치는 동안에도 그는 노동자였다. 택시기사였고, 도박장 매니저였고, 아내를 도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했다.
84년 채널4 다큐멘터리 ‘테러의 이면(The Other Face of Terror)’에 그가 비로소 실명과 얼굴까지 공개하며 출연해 자신의 진실, 즉 극우파로 산 20년과 내부첩자로 산 지난 5년의 진실을 고백하고 극우파의 이면의 진실을 폭로했다. 가디언은 당시의 충격을 두고 “(영국 극우파가) 할 말을 잃고 분노로 졸도할 지경이 됐다”고 썼다.
보복 살해 등 힐에 대한 극우파의 위협이 이어졌다. 소이폭탄 테러로 집이 전소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년까지 학교 강연과 집회 등을 통해 인종주의 극우집단의 해악과 비열함을, 불의와 부도덕을 폭로하는 데 헌신했다. 서치라이트는 “그 누구도(적어도 실명을 공개할 수 있는 이들 중에서는) 영국 극우운동에 레이 힐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람은 없었고, 반파시스트 세대에 영감을 제공한 사람도 없었다”고 썼다.
하지만 극우운동에 포섭된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계층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한사코 삼갔다. 극우의 유혹에 그들(의 처지)이 얼마나 취약한지, 유혹의 방식과 논리가 얼마나 교묘하고 능란한지, 그래서 저항하기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극우를 자라나게 하는 궁극적인 토양, 다시말해 책임이 정치의 실패, 정치의 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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