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여러분의 일상다반사를 들려주세요. MBTI상 확신의 논리형(T)인 8년차 기자와 뼛속까지 공감형(F)인 4년차 기자가 하나의 고민에 서로 다른 콘텐츠를 추천하는 큐레이션입니다. 평범한 이웃들의 비범한 고민에 특유의 단짠 제안을 해드립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29세 직장인입니다. 제 삶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래 만난 애인, 안정적인 직장, 많은 돈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먹고 살 만큼의 수입. 더 이상 바랄 건 없어요. 하지만 엄마는 늘 '그 회사를 계속 다닐 거냐'며 잔소리를 합니다.
소위 'SKY 대학'에 들어갔지만 딱히 직업 욕심이 없었어요. 주변 친구들은 로스쿨, 공인회계사, 고시 공부 등을 준비해서 지금 전문직을 갖고 있어요. 저는 딱히 잘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적당한 곳에 취업을 했죠.
원래부터 이렇게 욕심과 패기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특목고를 다니며 심한 입시 경쟁에 시달렸어요. 누군가 제 노트 필기를 훔쳐간 적도 있고, 동급생들과는 서로 어떤 과외 선생님께 배우고 있는지 등을 비밀로 했죠.
운이 좋아 상위권 대학에 들어갔지만, 입시가 끝나고 나니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이었어요. 더 이상 나를 괴롭혀가며 또 다른 경쟁 사회에 집어넣고 싶지 않았어요.
엄마는 제게 "똑똑하던 애가 왜 이렇게 변했느냐"며 화를 자주 냅니다. 저는 다시 치열한 경쟁과 질투가 가득한 세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각자의 일을 하면서 남에게 폐만 안 끼치고 살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혹시 문제가 있는 건가요?
정은진(가명·29·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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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 '토끼와 거북이'를 아시나요. 느린 거북이를 비웃던 토끼가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잠들어버린 까닭에, 거북이가 먼저 결승점에 도달하는 이야기. 은근·끈기의 대명사 거북이가 재주·꾀의 상징인 토끼를 이긴다는 교훈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저는 은진님에게 그림책 '슈퍼 거북'과 '슈퍼 토끼'를 추천합니다. 이 책은 경주 이후의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거북이는 경주에서 승리한 뒤 대박 스타가 됩니다. 거북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오고, 거북 동상까지 세워졌죠. 이렇게 이웃들의 기대가 쌓이니 거북이는 진짜 슈퍼 거북이 되기로 합니다. 매일매일 노력하며 누구보다도 빠르게 변한 거북이.
문제는 거북이는 행복하지가 않았다는 거예요. 딱 하루만이라도 느긋하게 자고 먹고 싶은 거북이. 그러다 토끼가 다시 경주를 제안해 이 둘은 또 경쟁을 하게 되는데요. 결론을 살짝 공개하자면 거북이는 그날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푹 잘 수 있어 행복했다고 해요. 그리고 자신의 본래 삶을 다시 찾게 됐답니다.
그렇다면 토끼의 삶은 어땠을까요. 경주에 진 토끼는 예상 밖의 패배를 경험한 뒤 힘들어합니다. 온통 거북이만을 칭찬하고 바라봐주는 매정한 세상. 결국 지쳐가던 토끼는 그토록 좋아하던 달리기를 그만두기로 합니다. 절대로 달리지 않기 위해 달리는 법을 잊어버리도록 훈련을 거듭하죠. 하지만 우연히 경주에 휩쓸리게 된 토끼는 다시 달리기를 하면서 심장이 뛰는 자신을 발견하죠.
느리면 어때요. 지면 어때요. 거북이면 어떻고 토끼면 어떤가요. 세상은 너무 우리를 끝없는 경주에 몰아넣는 듯하죠. 꼭 이겨야만 할까요. 지금 한 번 이긴다고 영원히 이기는 것도 아니고, 잠깐 기쁠 수는 있으나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저는 이미 은진님 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해요. 본인은 본인이 제일 잘 알죠. 내가 뭘 할 때 가장 기쁜지, 나다운지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이제 레이스를 치워내고,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웃으며 손잡고 '걷뛰' 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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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학창 시절과 취업 준비 시기를 회상하다 보면, 그야말로 그 시기를 버텨낸 것만으로 자신에게 경이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경쟁적인 시기를 대체 어떻게 견뎠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죠. 저 역시 '한 독기'를 자랑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요즘은 느슨한 삶에서 작은 의미를 찾아가고 있어요.
이런 은진님에게 2018년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소개하고 싶어요. 포스터 속 "잠시 쉬어가도, 조금 달라도, 서툴러도 괜찮아" 문장만 봐도 위로가 되지 않나요.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한 혜원(김태리)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했지만, 똑 떨어지고 맙니다. 남자친구와의 이별, 치가 떨리는 생활고. 치열한 도시 생활에 지쳐 불쑥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은 오랜 소꿉친구인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과 재회합니다.
"며칠 뒤면 돌아갈 거야." 입버릇처럼 혜원은 돌아갈 거라 말합니다. 이때의 도시는 냉혹하고도 경쟁적인 현대 생활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키운 농작물로 한 끼 한 끼를 만들어 먹으면서 어느덧 시골에서 보낸 시간은 사계절을 넘깁니다. 단단하게 의지가 되는 관계와 자극 없는 일상 속에서 그저 농사를 짓고 요리를 하고 소일거리를 하는 것만으로, 경쟁에 지쳤던 혜원은 점차 생기를 되찾고 생채기 난 마음을 회복합니다.
영화 속에는 아삭한 양배추 샌드위치, 포근한 수제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무지개 시루떡, 달콤한 밤조림 등 직접 정성스럽게 요리를 하는 과정과 등장인물들이 맛있게 한 입을 베어 물고 행복해하는 장면이 수없이 나와요. 103분의 러닝타임을 따라가다 보면, 일상 속 사소한 장면에서 놓치고 살았던 행복에 대해 무심코 깨닫는 계기가 생길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배가 고파진다는 부작용도 있지만요.
영화 끄트머리에서 혜원은 다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합니다. 물론 이렇게 경쟁 세계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계절 동안 자신의 토양을 단단히 다져놓은 덕분입니다.
은진님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인 겁니다. 자신을 좀먹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좋아하는 것을 아끼며 스스로 돌본 시간이 있어야, 훗날 맞닥뜨릴 치열한 세계에서도 당당하게 설 힘이 생깁니다. 전력질주하는 시기의 '독기'도 좋지만, 사람은 내연기관 달린 이동수단처럼 매 순간 질주할 수는 없다는 것. 필요한 순간 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료를 채워주는 쉼의 시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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