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태섭ㆍ김상근ㆍ김영란ㆍ김지윤
김하나ㆍ양정웅ㆍ오건영ㆍ우현주 추천
‘휴가철 독서 리스트 ’
여름 휴가철이 돌아왔다. 파도가 춤추는 바다로, 나무가 손짓하는 산으로 떠날 시기다. 말랑한 기분으로 꾸리는 배낭에 이따금 친구가 될 책 한 권 담는 것은 필수.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출판가에서 다독가로 소문난 8명의 명사에게 물어 '휴가철 독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추천인은 금태섭ㆍ김상근ㆍ김영란ㆍ김지윤ㆍ김하나ㆍ양정웅ㆍ오건영ㆍ우현주(가나다순). 이들이 '픽'한 도서와 추천 이유를 만나 보자.
1.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금태섭 전 국회의원 추천
휴가를 갈 땐 모든 게 가볍다. 짐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심지어 맨날 괴롭히는 부장에 대한 미움도 조금은 가벼워진다. 그런데 훌훌 떠나는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 남는 찝찝함이 있다. 무엇이냐고? 당연히 두고 가는 고양이에 대한 미안함이다. 아는 사람한테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좋아하는 간식도 잔뜩 챙겨줬지만 어디 집사의 마음이 그런가. 무엇보다 당사자인 고양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는 게 가장 답답하다. 혼자 놀러 가는 걸 용서해줄지, 그새 잊어버리고 새 주인과 정을 붙이는 건 아닐지.
반려동물을 남기고 휴가를 가야 한다면 이 기회에 그들의 인생관을 좀 알아보는 건 어떨까. 에른스트(E.T.A) 호프만의 명저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을 권해드린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지만, 바닷가나 계곡에서 슬렁슬렁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 일단 서문부터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진정한 천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자신감과 침착함으로, 독자들이 위대한 수고양이로 성장하는 법을 배우도록 나의 전기를 세상에 내놓는 바이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위대한 고양이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누가 아는가. 휴가가 끝난 뒤 당신의 고양이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될지.
2. '제2차 세계대전'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추천
이번 여름 휴가는 윈스턴 처칠의 저서 ‘제2차 세계대전’을 펼쳐보기 좋은 기회다. 특히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리더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 승리로 이끈 영국 총리다.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노벨 문학상까지 탔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 내려간 책에는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세계 정세를 주도한 지도자의 리더십이 돋보여 수상 배경을 짐작케 한다.
원본은 총 6권이다. 한국엔 상ㆍ하권으로 요약된 책이 출판됐다. 모두 읽기 부담스럽다면 하권을 권한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부터 전개된 전쟁 과정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처칠은 전쟁을 지휘하는 입장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렸다. 청년들의 희생도, 일반인들의 죽음도 뒤따랐다. 그 괴로움을 진솔하게 고백한 책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 잊혀서는 안 될 책이다. 처칠은 전쟁 후 세계 질서 재편을 놓고 강대국들과 긴박한 협상을 벌였다. 패권 국가들이 한국과 같은 나라들을 장기판 위에 놓고 어떻게 움직였는지 책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한국 역사가 이렇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강대국 관점에서 엿볼 수 있다. 현재 미국과 중국이 세계 패권을 놓고 일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국제 정세를 이해할 참고서가 되어줄 것이다.
3. '이스탄불'
김영란 전 대법관(아주대 로스쿨 석좌교수) 추천
휴가철 인기 여행지이자 튀르키예(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개인사가 맞물린 도시에 관한 에세이 '이스탄불'을 추천한다.
이스탄불은 파묵의 삶과 내밀하게 엮여 있다. 1952년생인 파묵은 오스만제국 쇠망 후 튀르키예가 서구식 제도와 문물의 도입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삼던 시절에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랐다. 책은 현대의 이스탄불보다 1,600여 년간 수도의 지위를 지키며 영예를 누리다 몰락해 가던 시절의 이스탄불을 이야기한다. 파묵은 유년과 청년 시절의 개인사와 함께 개인적 기억의 배경이 된 이스탄불의 풍경과 그에 대한 단상을 풀어낸다. 작가 자신을 비롯해 튀르키예인들은 서구 문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왔는가. 일제 강점과 6·25전쟁을 겪은 한국 독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쇠락을 경험한 튀르키예에 정서적 동질감도 느껴진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답게 문장도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파묵의 어린 시절과 이스탄불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사진 200여 장도 함께 담겨 있다. 서구의 시각으로 본 이스탄불, 그걸 접한 작가가 다시 바라보는 이스탄불의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이 참 좋았다. 여행이란 장소만의 여행이 아니지 않을까.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자 한 도시의 영혼을 만나는 문학적 여행기다.
4. '주소 이야기'
김지윤 국제정치학자(전 아산정책연구원 여론계량분석센터장) 추천
나에게 뭔가를 알려 주는 '지식전달형'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휴가 갈 때 1,000쪽짜리 묵직한 책을 들고 갈 순 없는 노릇이다. 평소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으면서도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어렵지 않은 그런 책, 최근 읽은 디어드라 마스크의 '주소 이야기'가 딱 그랬다. 주소 체계를 정치·사회·문화·역사 등 다양한 시각으로 뜯어보는 재미가 크다. 미국과 유럽, 한국과 일본,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전 세계 사례가 담겼다.
예를 들면, 문자 문화와 주소 형성 방식의 관계를 이 책으로 처음 생각해봤다. 미국과 유럽은 '스트리트(Street)'라고 부르는 길을 따라 주소가 만들어지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동(洞)'과 같이 블록 단위로 주소 체계가 잡혀 있다. (우리나라도 현재 도로명 주소로 개편됐지만 오래 사용된 체계를 기준으로 봤다.) 이 책은 그 차이가 문자 특성에 따라 갈린다는 뇌과학적 분석을 내놓는다. 나열하는 영어와 조합하는 한글에서 엿볼 수 있는 인식 방식의 차이를 뜻한다.
정부 권력과 시민에 항상 관심이 많은 정치학자로서, 주소와 정부 권력을 연결한 대목도 매우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주소는 징세·징집을 위해 탄생했다. 주소가 체계적일수록 정부가 국민을 더 '잘 관리한다' 혹은 '잘 감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엉성한 주소 체계로는 정책 지원이 어렵지만 시민의 자유도는 높다. 둘의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이런 주소와 정부 권력 관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다.
5. '한국 팝의 고고학 1990'
김하나 작가('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 추천
대중음악은 즐기는 것이다. 그 즐김의 흐름도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이 어느 시대 어떤 음악을 즐겼는지 들여다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인데, 이 책은 만만찮은 볼륨으로 1960년대부터의 대중음악과 사회상의 변화를 찬찬히 훑어본다.
바로 ‘한국 팝의 고고학’ 얘기다. 총 4권, 2,600쪽에 이르는 시리즈다. 1960, 70년대를 각각 다룬 1, 2권은 2005년 첫 출간됐다. 두 책에 대한 대중음악 전문가나 애호가들의 호평에 힘입어 1980, 90년대를 다룬 3, 4권이 지난 5월 출간됐다. 4권 집필에는 기존 저자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 외에 김학선 평론가도 합류했다.
방대한 자료를 찾아내고 확인하는 작업의 수고로움만 생각해봐도 이 시리즈의 존재에 존경심이 든다. 그런데 글이 술술 읽혀서 생각보다 아주 재미있고, 사이사이 실린 인터뷰 등 책의 만듦새도 탄탄하다. 특히 윤상과 듀스와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는 1990년대를 다룬 네 번째 권('1990 상상과 우상')은 내게 재미가 없을 수 없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모든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이 묵직한 아카이브를 들고 휴가를 떠나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다행히 전자책이 나와 있다.
6. '은하환담'
양정웅 연출가(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연출) 추천
'은하환담'은 한국의 설화를 이에 매혹된 작가들의 입을 통해 괴기스럽고, 때로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독특한 이야기로 재탄생시킨 책이다.
'아홉 작가의 한국 설화 앤솔러지'라는 부제대로 아홉 명의 작가가 각자 개성을 살려 선녀와 나무꾼, 견우와 직녀, 여우 누이 등의 오랜 옛 이야기를 다시 썼다. 곽재식, 이경희, 송경아, 전혜진 등 능숙한 이야기꾼들은 재미적 요소를 가미해 구전 설화를 현대물로 탈바꿈시켰다. 여우 누이 설화는 일제강점기 경성의 외국인 호텔 경영자와 조선인 수양딸 이야기 '매구 호텔'로 거듭났다. 견우와 직녀는 식량난을 맞은 미래로 배경을 옮겨 '견우도 직녀도 아닌'이라는 새로운 이야기가 됐다. 선녀와 나무꾼에 SF적 요소를 가미한 '파종선단'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는 현 시대를 향한 메시지도 담고 있다.
지인에게 선물받아 하룻밤 만에 다 읽었다. 작가들의 젊은 감각이 묻어나 무척 흥미로웠다. 한국의 전통적 요소와 현대적 스타일을 융합한 연출을 해 온 내게는 한국 설화를 기반으로 한 책이 반가웠다. 고조선 시대부터 인류가 다른 별에서 살아가는 먼 미래까지, 다양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각각의 매력을 품고 있다. 설화에 바탕을 두고 SF와 판타지를 섞은 기담 또는 괴담의 모습을 하고 있어 가독성도 좋다.
7.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오건영 신한은행 WM컨설팅센터 부부장('인플레이션에서 살아남기' 저자) 추천
현재 나타나는 현상, 그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과거 흐름들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최근 나타난 국제 유가의 급등과 중동 지역 분쟁 등은 단순히 지금 이 순간 갑자기 등장한 이야기가 아니다. 꽤 오래전부터 이어온 수많은 사연들이 얽히고 설키며 만들어졌다.
이례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의 중심에는 국제 유가의 급등이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이 유가를 뛰게 했고 강한 인플레이션 상승세를 만들었다. 이처럼 석유는 단순한 에너지나 원료가 아니다. 석유를 지배한 자가 세계를 지배했고 석유를 둘러싼 변화는 국제 질서를 뒤흔들었다. 9ㆍ11 테러, 이라크 전쟁, 미국발 금융위기, 이란 제재 등 수많은 전쟁과 테러, 정치적ㆍ경제적 사건의 중심에도 석유가 있었다.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는 여러 챕터로 나누어져 있어 쉬엄쉬엄 보기에 좋다. 저자의 스토리텔링 방식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알게 된다. 석유에 대한 역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게 이해하려면 안성맞춤이다. 에너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하는 분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8.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우현주 배우(극단 맨씨어터 대표) 추천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휴가철에 읽을 책 제목으로 너무 무거운 게 아닌가 싶겠지만 긴 호흡으로 끊김 없이 읽을 수 있어 추천한다. 인생에서 결코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필연적 죽음을 동반하는 우연한 질병일 것이다.
이 책은 우연을 연구하던 철학자가 질병을 조사하는 의료인류학자와 함께 나눈 서신 형식의 대화다. 40대 초반에 다발성 전이를 동반한 유방암을 앓게 된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일상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한다.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는 "당장 내가 먼저 교통사고를 당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그런 것"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지속하라고,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며 용기를 준다. 서로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사이도 아닌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삶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나누는 관계 맺음 자체가 우연과 필연을 생각하게 한다. 삶에 대한 근본적 고민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속된다. 한순간도 날카로운 유머와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장점도 있는 책이다.
결국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피하려고만 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면 역설적으로 빛나는 삶의 순간순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를 비우는 재미를 택하는 대신 영혼을 채우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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