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의 저주, 쌀 딜레마]
쌀 20㎏ 평균 도매가, 작년보다 12%↓
햅쌀 출하 시작되면 추가 하락 불가피
다른 작물 재배 전환 유인책 마련해야
“8, 9월부터 햅쌀이 나오면 기존에 팔던 구곡 가격은 20㎏당 최소 5,000원에서 1만 원까지 더 떨어질 겁니다. 창고에 쌓여 있는 물량을 보면 한숨만 나오죠.”
14일 세종 연동면 소재 세종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 1번 창고에 들어서자 지난해 수확한 벼 알곡을 담은 800㎏짜리 자루가 2단으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2~6번 창고는 물론, 곡물저장시설(사일로) 역시 언제 도정될지 기약 없는 쌀 알곡으로 가득했다. 무려 4,100톤에 달하는 양이다. 지난해 이맘때보다 2,000톤 안팎 많다.
박종설 세종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대표는 “냉면을 선호하는 7~8월은 휴가와 학교 방학까지 겹쳐 대표적인 쌀 비수기”라며 “울며 겨자 먹기로 쌀을 낮은 가격에 팔아야 할 거 같다”고 토로했다.
다른 곳 상황도 비슷해 세종을 포함한 충남 소재 20여 개 RPC는 올해 들어 6월까지 약 90억 원의 손해를 봤다. 지난해 같은 기간엔 약 64억 원 흑자였다.
쌀과자로 못 잡은 쌀값, 쌀가루로 잡힐까
반복되는 쌀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간 정부도 각종 대책을 쏟아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진 못했다. 무엇보다 시장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지만 앞선 탓이다. 한마디로 백약이 무효다.
앞서 2009년에도 쌀값 하락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는 쌀라면·쌀국수·쌀과자 등 쌀 가공식품 활성화 계획을 발표했다. 쌀 소비 확대 차원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 이후 쌀종이를 만들어 쓰자는 아이디어까지 제시했지만, 쌀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는 가루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쌀(분질미)을 활용한 쌀 가공산업 활성화 방안을 대안으로 내놨다. 분질미 재배를 늘려 2027년까지 밀가루 수요의 10%를 대체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은만 쌀전업농중앙연합회장은 “수입 밀가루보다 비싼 분질미를 가공업계에서 얼마나 쓸지 의문”이라며 “소비처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이전 정책들처럼 용두사미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진한 수요 확대 정책과 함께 공급 감소 방안도 부실했다. 벼농사는 다른 작물보다 노동 강도가 적고 기계화 설비도 잘돼 있어 농가 입장에선 쉽게 전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이런 ‘저항’을 뛰어넘을 당근책이 부족했다는 평가다.
일례로 정부는 2018년부터 3년간 한시적으로 논의 타작물 재배 지원 사업을 시행했다. 그런데 2020년 참여 농가 네 곳 중 한 곳(25%)은 적합하지 않은 농지 환경 등을 이유로 이듬해 다시 벼농사로 돌아섰다.
김태훈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식량안보 차원에서 농지는 그대로 유지하되, 타 작물 재배가 가능토록 논을 정비하거나 농기계를 지원하는 등 관련 지원을 폭넓게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풍년의 저주'에 빠진 나락
계속되는 정책 실패와 소비 감소 탓에 나락으로 떨어진 '나락(벼)' 가격은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오게 하고 있다. 이미 굳어진 공급 과잉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애써 재배한 쌀을 헐값에 넘겨야 하는 농민과 시장 안정 조치 등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정부 모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에 따르면, 쌀 20㎏ 도매가격(등급 '상' 기준)은 이달 평균 4만7,462원에 거래됐다. 연초부터 7월까지 평균 도매가격은 5만314원이다. 지난해 연평균(5만7,173원)보다 약 12% 하락했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1월(6.8%) 이후 약 24년 만에 최대폭 상승한 지난달 물가상승률(6.0%)이 무색할 정도다.
쌀값의 ‘나 홀로 폭락’은 지난해 쌀 생산량(388만 톤)이 전년보다 10.7% 증가한 영향이다. 매년 급감하는 쌀 소비까지 겹쳐 적체가 심해졌다. 실제 쌀밥은 그야말로 찬밥 신세다. 지난해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6.9㎏으로, 30년 전인 1991년 116.3㎏의 절반 수준이다.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155.8g에 불과하다. 하루 종일 밥 한 공기(200g)도 먹지 않는 셈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농업전망 2022’ 보고서를 통해 “과잉 기조가 계속되면서 2031년 쌀 생산량은 소비량보다 21만8,000톤 많을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예측한 공급과잉 물량(25만4,000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규모로, 앞으로도 계속 쌀이 남아돌 거란 얘기다. 그만큼 농민의 시름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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