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여러분의 일상다반사를 들려주세요. MBTI상 확신의 논리형(T)인 8년 차 기자와 뼛속까지 공감형(F)인 4년 차 기자가 하나의 고민에 서로 다른 콘텐츠를 추천하는 큐레이션입니다. 평범한 이웃들의 비범한 고민에 특유의 단짠 제안을 해드립니다.
저는 민폐를 정말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고, 늘 예의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뉴스를 보면 언젠가부터 너무 무례한 사람들이 많아진 느낌이에요. 지하철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자리에 앉으려 난리고, 쉬러 가는 카페나 영화관에서도 예의범절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원래 저는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언젠가부터 노키즈존에 찬성하게 됐어요.
사실 저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어요. 버스에서 자리 양보를 안 한다고 어떤 할아버지가 소리지른 적이 있고,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데 술 취한 남성이 들어와 난동을 피워 경찰을 부른 적도 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 또한 인류애를 잃어버렸어요. 양보는커녕 그냥 사람들을 마주하기도 싫어요. 지나가는 타인이 배려없고 무식한 느낌이 들면 혐오감부터 들어요. 지하철 장애인 시위가 있으면 귀찮게 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노동자 집회나 퀴어퍼레이드를 보면서 시끄럽다는 생각에 짜증만 나네요.
여유를 잃어서인가요. 어느새 저도 혐오 표현을 하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돼가는 건 아닌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과 사회에 대한 믿음을 잃고 배척을 당연시 여기게 됩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현정(가명·32·자영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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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감각이 '한 예민'하기에 현정님의 사연을 읽으면서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민폐와 무례를 감싸주기엔 사회는 많이 팍팍하고 우리에겐 여유가 없죠. 저 또한 지하철 1호선을 탈 때면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무조건 이어폰을 챙기려 하고, 가끔 출근길에 장애인 시위를 마주하면 괜히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현정님에게 티빙의 이효리 리얼리티 프로그램 '서울체크인' 8화를 추천합니다. 지난달 10일 공개된 영상에서 배우 구교환과 그의 연인이자 영화감독인 이옥섭이 이효리를 만나 술자리를 갖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구교환은 "한때 누군가를 엄청 미워했는데, 그때 이 감독이 '그 사람을 귀여워해 보라'고 했다"며 "그 덕에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옥섭은 "미국 여행할 때 버스를 탔는데 어떤 여성 분이 매니큐어를 칠하고 계셨다"며 "그 행동이 싫었는데, 내 영화 속 주인공이라 생각하니 너무 사랑스럽게 그리고 싶은 인물이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누가 너무 미우면 그냥 사랑해버린다"고 전했는데요.
저는 이 영상을 보면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우리는 사실 안면이 없는 사람의 민폐나 무례를 마주할 때는, 그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만 만나는 거잖아요. 그 한 면만 보다 보니 그의 특정 행동을 싫어하게 되는 건데요.
이옥섭 감독처럼 타인의 서사나 맥락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지하철 운행을 막으면서까지 이동권을 쟁취하기 위해 나서야 했던 장애인들의 처지, 고된 노동 끝에 라면 한 봉지를 사 집에 가려는 노인의 사연 등. 오롯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상상력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우리 사회는 민폐를 주고받으면서 함께 이어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 또한 어린 시절 기차나 고속버스 안에서 울고불고 떼쓰며 자라왔을 겁니다.
단순히 시혜적인 관점에서 '정신승리'를 하며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다가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할 때, 짜증과 혐오로 가득 찬 현정님의 마음도 조금은 자유로워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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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개인주의가 확산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침범 당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역력합니다. 무례한 사람이 무턱대고 침입하는, 안온한 일상을 지키려는 노력은 무척 중요하기에 하루하루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현정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1989년 사람들의 '장소'에 관한 통찰력을 담은 책 '제3의 장소'를 펴냈는데요. 그에 따르면, 제1의 장소인 가정, 제2의 장소인 일터 혹은 학교에 이어,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곳인 '제3의 장소'가 현대인에게는 무척 중요합니다.
개인이 건전하고 활기찬 사회생활과 사교 활동을 영위하는 제3의 장소가 쇠퇴하면서 현대인의 삶은 황폐화합니다.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골목을 채우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아이들은 키즈 카페를 전전합니다. 때때로 어른들의 눈초리를 피해 노키즈존을 전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기간 사회적 거리두기로 더욱 심화했습니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믿음을 잃은 현정님은 무엇보다 '제3의 장소'를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집과 직장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젠더, 장애, 빈부, 학력, 직업에 관계없이 다채로운 사람을 만나 나의 컴포트존(comfort zone·안전지대)을 조금씩 넓혀가다 보면,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부대끼며 사는 것이 곧 인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균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시작을 도울 콘텐츠로,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추천합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는 신입 변호사 우영우(박은빈)가 로펌에 취직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는데요.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시선으로 세상의 편견과 마주치다 보면, 우리 사회가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억압적 도덕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주눅 들게 하는지 바라볼 수 있게 돼요.
"한스 아스퍼거는 나치 부역자였습니다. 그는 살 가치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를 구분하는 일을 했어요. 나치의 관점에서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은 장애인, 불치병 환자, 자폐를 포함한 정신질환자 등이었습니다. 80년 전만 해도 자폐는 살 가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80년 전만 해도 나와 김정훈씨는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지금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의대생이 죽고 자폐인이 살면 국가적 손실’이란 글에 ‘좋아요’를 누릅니다. 그게 우리가 짊어진 이 장애의 무게입니다."
극 중 우영우는 의대생 형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김정훈의 변호를 맡은 뒤 이같이 독백합니다. '살 가치' '국가적 손실' 같은 것은 대체 누가 규정하는 것일까요. 장애인은 종종 불편을 유발하기에 숨어지내야 하는 걸까요. 비장애인은 늘 언제나 무해할까요.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이 난관을 헤쳐나갈 때마다 맞닥뜨리는 세상의 편견과 마주하다 보면, 기실 '민폐'를 끼치는 존재란 명확히 존재하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도록 돕는 우리의 인내심이 바닥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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