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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이냐, 참조냐… 유희열 논란이 쏘아올린 K팝의 오랜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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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이냐, 참조냐… 유희열 논란이 쏘아올린 K팝의 오랜 관행

입력
2022.07.21 04:30
수정
2022.07.21 09:13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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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의 그늘, 표절 논란] ①꼬리 무는 표절 뒤지기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유희열. 안테나 제공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유희열. 안테나 제공

국내 대중음악계가 잇딴 표절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인 유희열로 촉발된 가요계 표절 의혹이 가수 이적 등으로 번지며 장기화하고 있고 일부 네티즌들은 과거 표절 시비가 일었던 곡들까지 다시 끄집어내고 있다. 표절 여부는 법적으로 당사자 간 문제인 데다 표절과 레퍼런스(참조), 영향 등의 경계가 모호해 제3자가 속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시각이 있지만, 가요계의 잘못된 관행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천재 작곡가'에 대한 환상 깨지며 배신감도 커져

작곡가로 시작해 기획사 대표를 거쳐 인기 방송인으로 오랫동안 시청자들과 함께해온 유희열은 18일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13년간 진행을 맡았던 KBS2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폐지에 이르게 한 건 팬들의 실망과 분노였다. 유희열은 지난해 9월 발표한 ‘아주 사적인 밤’이 일본 대중음악의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의 곡 ‘아쿠아’와 유사하다는 의혹이 지난달 제기되자 "무의식 중에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유사한 진행 방식으로 곡을 쓰게 됐다”며 “두 곡의 유사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사과했다.

사카모토 류이치. 빈체로 제공

사카모토 류이치. 빈체로 제공

사카모토가 두 곡의 유사성을 인정하면서도 “법적 조치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다”며 유희열을 격려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같은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내가 켜지는 시간’, 2002년 성시경에게 준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토이 3집 수록곡 ‘넌 어떠니’, 2013년 MBC ‘무한도전’ 출연을 위해 썼던 ‘플리스 돈트 고 마이 걸’ 등이 잇따라 도마 위에 올랐다. 유희열로 촉발된 표절 의혹은 이적에게로 이어졌다. 그가 2013년 발표한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 브라질 가수 라이문두 파그네르의 1995년 곡 ‘루비 그레나(Rubi Grena)’와 유사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 그러나 소속사 측은 “대응할 가치가 없다”면서 표절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아주 사적인 밤’ 한 곡으로 시작한 논란이 일파만파 커진 것은 무엇보다 유희열이 ‘서울대 출신 천재 작곡가’로 명성을 쌓아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팬들은 "추억을 도둑맞은 듯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최규성 대중음악평론가는 “여러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창작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인물에게 가졌던 환상이 깨지면서 사태의 여파가 더 큰 듯하다”고 말했다. 천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과도한 집착과 이를 이용하는 마케팅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대중의 배신감이 더 커졌다는 얘기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우리 사회가 천재병에 걸려 지나치게 창작자들을 떠받드는 경향이 있는데 유희열은 그런 측면에서 과대 포장된 면이 있다"고 말했다.

가수 겸 작곡가 유희열이 표절 논란에 휩싸이면서 유희열은 18일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포함한 모든 방송에서 하차하겠다고 밝혔다. KBS2 제공

가수 겸 작곡가 유희열이 표절 논란에 휩싸이면서 유희열은 18일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포함한 모든 방송에서 하차하겠다고 밝혔다. KBS2 제공


"표절 시비는 당사자 간 문제" VS "대중들 반응에 맞춰 변화해야"

유희열과 사카모토가 해당 곡의 유사성을 인정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록 밴드 부활의 리더인 김태원은 지난 5일 방송된 MBC '100분 토론'에서 "8마디가 흐트러짐 없이 똑같다"고 단언했으나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일부 닮고 일부는 다르다"고 반박했다. 정 평론가는 다른 곡들에 대해서도 "'아주 사적인 밤'의 유사성까진 인정하나, 표절이라고 할 만큼 일치하는 곡은 없었다"고 맞섰다. 하지만 다소 중립적인 입장에 있는 이들도 일부 곡은 도가 지나쳤다고 말한다. 이대화 평론가는 "유희열은 창작과 레퍼런스 사이의 경계가 아슬아슬한 사람"이라면서 선을 넘어서는 레퍼런스나 모방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유희열이 방송활동까지 중단했지만 법적으로 따지면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 표절은 원작자가 고소해야 성립되는 친고죄인데, 당사자인 사카모토가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는 “저작권법 위반은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표절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민사 문제인데 정의를 바로 세우는 시민운동이나 인민재판처럼 흐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온라인상에선 유사한 대목만 비교한 뒤 표절로 몰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아 '마녀사냥'에 대한 우려도 크다. 김학선 평론가는 “표절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곡들까지도 일부 네티즌과 유튜버들이 확증 편향에 빠져 표절로 몰아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대중음악인이 대중의 정서를 외면한 채 법 형식만 따지는 것도 모순적 태도다. 법적 소송과 무관하게 다수의 팬들이 특정 형태의 곡을 표절로 인식한다면 창작자도 이에 맞춰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특히 다른 곡을 레퍼런스 삼아 곡을 만들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는 제작 방식은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표절이라 할 만큼 선율이 같지 않고 화성 전개도 다르지만 전체적 구성이 유사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선율이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관행적으로 사운드 구성 전반과 선율을 참고하며 레퍼런스라고 했지만 리듬과 비트가 중심인 요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레퍼런스가 아닌 샘플링”이라며 “과거의 창작 관행과 요즘 음악 소비자의 인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대중음악 창작의 방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김헌식 평론가는 “논문을 쓸 때 세세하게 각주를 달듯 레퍼런스든 샘플링이든 출처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문화가 필요하다”며 “K팝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상황에서 관행처럼 이어지는 잘못된 창작의 행태를 바로잡지 않으면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대중 수준 낮게 보는 풍토 있었다"...저작권 법 개정과 함께 인식도 제고돼야

제작자나 작곡가 등 음악 제작에 직접 관련된 이들 사이에선 한탄과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번 사태와 별개로 그간 한국에 대한 해외의 무관심을 악용해 교묘하게 외국 곡을 모방해 곡을 만드는 악습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20년 경력의 작곡가 겸 제작자는 “어떻게 하면 표절을 교묘히 피해갈 수 있는지 사석에서 공공연히 말하는 작곡가들도 여럿 있다”며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국 음악을 쓰면 모르겠지 하며 음악 소비자들의 수준을 낮게 보는 풍토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K팝이 성장하면서 해외 작곡가와 협업하거나 집단 창작을 하는 방식이 일반화했지만 이전엔 소수의 스타 작곡가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여러 곡을 의뢰받은 작곡가가 마감에 쫓겨 유혹에 넘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선 표절 시비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는 일이 종종 벌어지지만 국내에서 표절 소송이 흔치 않은 것도 악의적 모방의 배경으로 꼽힌다. 미국에선 2013년 로빈 시크의 히트곡 ‘블러드 라인’이 마빈 게이의 곡을 표절했다는 판결을 받으며 60억 원가량을 배상한 사례가 있다. 레드 제플린의 명곡 '스테어웨이 투 헤븐'도 지난 2014년 6,000억 원에 이르는 배상금이 걸린 저작권 침해 소송에 휘말렸는데 6년간의 공방 끝에 표절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미국 가수 로빈 시크. 유니버설뮤직 제공

미국 가수 로빈 시크. 유니버설뮤직 제공

하지만 국내에선 2013년 프라이머리의 '아이 갓 시'가 해외 곡과 표절 시비에 휘말리자 저작권 일부를 양도하며 정리했던 것처럼 소송에 이르기 전 당사자 간 협의로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다. 강일권 대중음악평론가는 “궁극적으로 표절을 최대한 줄이려면 저작권 침해에 관해 강력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절 관련 소송으로 배상받을 수 있는 금액이 많지 않으니 애초에 소송 자체가 제기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신승훈 김건모 클론 등을 제작한 김창환 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 회장은 “우리나라는 저작권과 관련한 교육이 부족한 탓에 논문표절, 기사표절, 상표표절 등 여러 분야에서 저작권 침해가 양심의 가책 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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