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 현금화가 이뤄지기 전에 바람직한 해결방안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18일 도쿄에서 열린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이같이 공언했다. 19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예방한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가 일본을 향해 '현금화'(한국 내 자산 매각명령) 이전에 대안을 내놓겠다고 공식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이르면 8월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대법원의 현금화 확정 판결에 앞서 해법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외교부도 19일 브리핑에서 같은 입장을 반복했다. 피해자 측도, 우리 정부도, 일본도 현금화라는 '파국'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그 전에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박 장관은 방일 직전 기자간담회에서도 똑같은 의지를 밝혔다.
다만 상대인 일본 외교장관 면전에서 공언하는 건 무게감이 달라 보인다. '일본' 또한 문제 해결의 주체이자 변수인 상황에서 외교부가 단언하듯 속내를 드러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거나 무언가 복안을 마련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일단 시작은 긍정적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5년간 끊기다시피 했던 한일 외교수장 간 양자소통이 재개됐고 △앞으로도 양측 간 수시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셔틀 외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했으며 △양국이 강제징용 문제의 조기 해결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당초 박 장관의 일본 방문은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충격적인 사망으로 늦춰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아랑곳없이 예정된 대로 박 장관은 대한해협을 건넜다. 2017년 12월 이후 4년 7개월 만에 한일 양국이 양자회담을 연 것만으로도 큰 성과로 꼽힌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 배석한 외교부 당국자는 “박 장관이 일본 측에 민관협의회 내용을 직접 설명한 것 자체가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민관협의회’는 지난 4일 강제징용 배상 문제 해법 마련을 위해 외교부가 출범시킨 협의체로 피해자 측과 법률ㆍ경제ㆍ외교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하지만 일각에선 ‘우리 정부가 스스로 현금화 문제 해결의 시한을 설정한 것 자체가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일본은 “한국에서 알아서 해결방안을 마련하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실제 우리 정부는 이번 회담에서 일본 측으로부터 "경청하고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진전된 입장을 전달받지 못했다. 양국의 공통된 인식을 담보할 만한 회담 직후 공동기자회견 등의 퍼포먼스도 없었다.
무엇보다 현금화를 막기 위한 최대 관건인 피해자 설득이 녹록지 않다. 우리 정부와 한일 양국 기업 등 제3자가 대신 기금을 만들어 우선 배상하고 이후 구상권을 청구하는 ‘대위변제’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지만 피해자들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 전범기업들에 직접 책임을 묻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양금덕ㆍ김성주 할머니를 지원하는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소송대리인단은 최근 “당사자의 입장을 존중해 가해자인 미쓰비시 측의 진솔한 사죄와 배상 이외의 다른 해결방안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민관협의회 불참을 선언한 상태다. 두 할머니가 제기한 현금화 판결이 가장 많이 진전됐다는 점에서 이들의 공백은 향후 민관협의회 행보에 적잖은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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