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울수록 가볍게, 어려울수록 쉽게.
인문학 책의 변신은 죄가 없다. 문ㆍ사ㆍ철(文ㆍ史ㆍ哲)은 어렵고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친절함과 감각을 새로 입힌 책들이 잇따라 출판되고 있다. 경기 침체, 세대 갈등, 기후 위기 등 실존하는 문제의 해답을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다가가려는 새로운 시도다.
손바닥만 한 앙증맞은 사이즈, 시선을 끄는 새빨간 양장 표지를 겉에 두른 민음사 ‘탐구 시리즈’는 트렌디한 인문책의 대표주자라 할 만하다. 젊은 학자들이 철학ㆍ문화비평ㆍ과학기술 주제를 입담 좋게 풀어놨다. 세대ㆍ젠더ㆍ계급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한 ‘철학책 독서 모임’, 영화 ‘모가디슈’와 드라마 ‘킹덤’ 등 대중문화를 해부해 우리 사회를 들여다본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여성의 눈으로 과학기술계를 분석한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등 총 10권 중 3권이 먼저 나왔다.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책에 독자들은 호응했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출판 한 달여 만에 1, 2쇄(5,000부)를 ‘완판’해 3쇄 제작에 들어갔다. 다른 두 책을 합하면 누적 1만 부 가까이 팔렸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자는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때문에 책이 안 팔린다고 하지만 거꾸로 스마트폰 안에서 웹소설 같은 텍스트 소비는 늘고 있다”며 “인문학 책이지만 가르치려 하지 않고, 에세이 형식으로 가볍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기획한 게 독자들의 반응을 끌어낸 것 같다”고 했다.
김영사의 ‘굿모닝 굿나잇’ 시리즈도 지난해부터 총 9권 출판된 지식ㆍ교양 분야 스테디셀러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등 명강사들이 인문ㆍ사회ㆍ예술 분야 지식의 정수를 150쪽이란 콤팩트한 사이즈 안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아침에 읽기 시작하면 저녁 퇴근 무렵이면 책장을 덮을 수 있다’는 콘셉트가 매력.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생태적 전환, 슬기로운 지구 생활을 위하여’는 6쇄를 찍어 2만 부 가까이 팔렸다.
지역 출판사들의 참신한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어딘가에는 OOO이 있다’ 시리즈는 서로 다른 지역의 다섯 출판사가 의기투합해 '지역 이야기'를 다룬 책 5권을 동시에 펴냈다. 충무김밥의 원조를 찾아 나선 ‘어딘가에는 원조 충무김밥이 있다’(통영ㆍ남해의 봄날), 젊은 부부 인쇄공의 태백 정착기를 다룬 ‘어딘가에는 아마추어 인쇄공이 있다’(고성ㆍ온다프레스), 충북 옥천 이주여성들이 들려주는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옥천ㆍ포도밭출판)’ 등의 책들이 낯설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전해준다.
정은영 남해의 봄날 대표는 “인문학 책이어서 진입 장벽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소재를 가볍지 않게 다루면서도 디자인은 조금 트렌디하게 접근했다"며 "어딘가에는 이렇게 지역의 문화를 열심히 전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지역 책방들에서 먼저 판매를 시작했는데 열흘 만에 '5권 묶음' 350세트(1,500부) 첫 물량이 모두 판매됐다고. 이제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도 뜨거운 지역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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