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판결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판결이 쌓여 역사가 만들어진다. 판결에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주목해야 할 판결들과 그 깊은 의미를 살펴본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2006년 노무현 대통령 때 임명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2월 취임하여 정권이 교체되었음에도, 잔여임기가 1년 이상 남은 정연주 사장은 사퇴하지 않았다. 그러자 잘 알려진대로 이명박정부는 정연주 사장을 쫓아내기 위해 권력기관을 총동원했다. 2008년 6월부터 감사원 감사와 검찰수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감사원은 한국방송공사 부실 경영, 인사 전횡 등을 이유로 한국방송공사 이사회에 정연주 사장의 해임제청을 요구했다.
한국방송공사 이사회는 임시 이사회를 개최하여 해임제청을 결의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1일 해임제청을 받아들여 정 사장을 해임했다. 감사원 감사가 시작된 지 2개월 만에 전광석화처럼 사퇴시켰다. 그 직후 검찰은 2008년 8월 정 사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KBS가 국세청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1심 승소가액보다 낮은 금액의 법원 조정안 권고를 받아들여 소송을 취하함으로써 KBS에 손실을 입혔다는 혐의였다.
정연주 사장은 해임처분에 불복하여 제소해 대법원까지 전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피고 이명박 대통령이 처분의 사전통지나 의견제출 기회를 주지 않는 등 행정절차를 위반한 만큼 해임처분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정권교체로 기세등등하게 기본적 법 절차도 지키지 않았던 위법행위에 제동을 건 것이다. 또한 법원은 정연주 피고인에 대하여 대법원까지 모두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이 요구하면 검찰은 검찰권 남용도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냈다. 검찰이 KBS와 국세청 소송에 대한 법원 조정안 수용을 문제 삼아, 정 사장을 배임죄로 기소했는데, 결국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에 대한 법원의 조정안 수용 문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인혁당 사건의 국가배상사건 1심 판결 후 가지급된 배상금 중 일부가 과다 계상됐다는 대법원 판결이 2011년 나왔는데, 피해자들이 반환할 액수가 지연이자 때문에 원금보다 많게 되는 문제점이 생겼다. 법원은 특정 피해자가 반환할 원금 5억 원을 분할납부하면, 지연손해금 약 9억 원을 면제하는 조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문재인정부 시절 소송수행을 하던 국가정보원은 법원 조정안을 받아들이면, 국가가 채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서 (정연주 사장처럼) 배임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수용을 거부했다. 이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국정원은 조정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고, 법무부는 지난 6월 조정안을 수용했다.
KBS 정연주 사장 사건과 유사한 일은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경우가 그렇다. 김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사표 제출을 강요한 혐의로 기소돼 결국 징역 2년이 확정되었다.
이처럼 정권교체 때마다 임기가 보장된 기관장을 사퇴시키려는 건 국정철학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들에게 자리를 나눠주려는 조급함 때문이기도 하다. 정권교체를 이룬 집권층은 한 자리씩 차지하니 구름 위를 걷듯 행복하다. 자신들이 행복하니 국민도 행복한 줄 안다. 영원히 자기 세상인 양 법치주의도 무시한다. 복잡한 국정현안 해결을 위한 절박한 마음도 부족하다. 정연주 사건 등은 결국 당시 대통령의 반법치적 자세와 공권력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종결되었다. (그간 저의 칼럼을 게재해 주신 한국일보와 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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