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너무 똑똑했다. 너무 어리석었다. (…) 너무 사랑이 넘치고, 증오가 넘쳤으며, 너무 남자 같은 반면, 충분히 남자 같지 않았다.”('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더숲 발행) 그래픽 노블 작가 켄 크림슈타인이 20세기 최고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1975)에 대해 한 말이다.
아렌트는 철학자 칸트의 고향인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유대인이라 놀림 받으며 자랐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집회에 참가했고, 열일곱 살 무렵에는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말하는 여학생은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는 당시 독일 학교에서는 골칫거리였다. 그녀는 교사에게 반항하다 퇴학당하는 바람에 동급생들보다 일 년 먼저 마르부르크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선 하이데거가 새로운 철학 강의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이데거의 출석부는 이후 유럽과 미국의 사상계를 이끌어가게 될 젊은 수재들의 이름으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말을 들을 만큼 똑똑했다. 20세기 초의 유럽 사회가 남성의 미덕으로 꼽는 자질들을 넘치도록 겸비했기에 '남자 같은' 여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너무 어리석었다. 이미 다른 여성 제자와 결혼해 아이가 두 명이나 있는 유부남 교수 하이데거의 연인이 되고 말았다.
1933년 나치가 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아렌트는 충격에 빠졌다. 말도 안 되는 정치세력이 집권에 성공해서라기보다는 친구라고 믿었던 독일 지식인들이 너무 빠르게 나치의 부역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하이데거의 행태가 놀라웠다. 그는 유대인 교직원들을 해고하라는 정부 시책을 거부하다 쫓겨난 전임 총장을 대신해 프라이부르크대의 총장이 되었다. 독일을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그녀는 평생 순응적인 지식인 그룹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간직했다. 이 감정은 그녀가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정치사상가로서 행동하게 만들었다.
1959년 독일 함부르크 자유시가 수여하는 레싱상 수상 강연에서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레싱의 위대성은 인간 세계 내부에 (…)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기뻐하고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계속될 것임을 즐긴 데 있다."('어두운 시대의 사람들'·한길사 발행) 그녀는 바로 전 해에 쓴 '인간의 조건'에서 이미 '유일한 진리'를 옹호하는 전통 사상과 대결하며 '대화'라는 인간 행위의 고귀한 영역을 지키고자 애썼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활동은 노동, 작업, 행위로 이루어진다. '노동'은 가사나 농사일처럼 삶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하는 반복적 활동이다. '작업'은 유용한 사물과 도구를 제작해서 인간에게 고유한 세계를 만든다. 탁자를 만드는 목수의 머릿속에 설계도가 존재하고 그에 따라 결과물이 나오듯, 작업은 계획하고 예측한 대로 사물을 얻을 수 있는 활동이다. 어떤 부모들은 갓난아이를 보며 작업의 욕망을 불태운다. '작품 한번 만들어 보자고. 녀석을 훌륭한 의사로 키워야지. 아니 판검사가 나으려나?' 하지만 아이가 제 욕구를 드러내며 짜놓은 계획표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부모는 존재의 복수성(plurality)을 절감한다. '얘는 나와 다른 존재이구나. 대화가 필요한가?'
아렌트의 구분법대로라면, 타자를 전제하는 대화는 '행위'에 속한다. 행위란 사람들 사이에서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그런데 행위에는 불안이 따른다. 나와 다른 욕구와 관심을 가진 타인들이 내 의도대로 반응하지 않아서 행위의 결과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불안이란 대부분 이런 것이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통제 과정에 속해서 불안을 제거하려는 욕구가 생겨난다. '행위'하는 대신 '기능'하려는 욕구 말이다.
기능하기는 행위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된다.('한나 아렌트의 말'·마음산책 발행) 이제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람은(부모든, CEO든, 총통이든) 한 명이면 족하고 나머지는 그 계획에 따라 기능하면서 예상한 결과를 얻으면 된다. 대화는 불필요하다. 매뉴얼을 숙지하고 실행하라. 만일 최고 결정권자가 머릿속에서 지옥을 그리면 지옥의 질서가 그대로 실현된다. 이것이 기능적 안전성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안전하게 지옥에 도착했다! 아렌트는 기능하기는 복종의 쾌감을 주는 변태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행위하기가 기능하기로 대체될 때 대화와 설득의 공간인 공적 영역은 사라진다. 상명하복의 원칙을 신봉하고 공무원과 국민은 자기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주면 된다고 여기는 최고 결정권자가 있다고 하자. 자신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이라 확신할 테지만, 아렌트는 망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그의 마음이 설령 진심일지라도 정치는 실종되고 만다. 그가 유일한 진리의 담지자로 자처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소통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대화하고 행위할 가능성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현대 사회에서는 행위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작업에서 중요한 '유용성의 원리'도 무너졌다고 진단한다. 매일매일 유용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세계 5위의 헌옷 수출국이다. 이 옷들이 유용성에 따라 만들어졌다면 개발도상국으로 보내져 쓰레기 산을 이룰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일주일마다 신상품을 쏟아내는 울트라 패스트 의류산업은 우리 삶의 궁극 척도가 사물의 유용성이 아님을 보여준다. "(유용성의) 원리는 이제 대상의 사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과 관계 맺게 된다. 이제 생산성을 자극하고 고통과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유용한 것이다."('인간의 조건') 과잉 생산되고 과잉 소비되는 사물은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다. 생산성에만 유용할 뿐. 더 많은 소비를 외치는 열망은 더 많은 노동을 외치는 열망의 다른 얼굴이다. 이 열망은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서 행위와 사유의 가능성을 빼앗고, 그들을 더 많은 노동, 더 위험한 노동으로 내몬다. '인간의 조건' 마지막 장에서 아렌트는 탄식하는 어조로 이를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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