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시험에 이런 주제의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답을 써야 하나요? 사회언어학 강의를 마친 후 한 학생이 내게 다가와 던진 질문이었다. 강의 말미에 사회의 언어 현상은 단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기에 딱 떨어지는 정답 같은 것은 없다고 한참을 강조한 후였다.
내가 강의에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어떤 말을 당위적으로 써야 한다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선언하고 강요하는 방식으로는 이 사회의 언어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특정 현상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어요. 이 수업은 그런 고민을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 학생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그 학생은 침묵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묻고 싶었던 말을 대신한 것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답답했을 것이다. 일타강사처럼 카리스마 있게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 의심하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와! 이렇게 외쳐야 하는데, 두리뭉실하게 함께 고민해보자고 하고 있으니. 한국 교육이 학생들 앞에 쌓아 올린 커다란 벽. 그 벽의 존재를 알려주는 '그래서 정답이 뭔가요?' 질문. 학생들은 그 벽 너머에 진짜 지식의 세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런 벽은 예비 교사들과 모의 수업 실습을 하는 과정에서도 느껴진다. 예비 교사들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가상의 카메라를 응시하며 핵심만을 딱딱 추려 강의한다. 그런 모의 수업을 하는 예비 교사들에게 학생들은 자신의 말에 추임새를 넣는 존재일 뿐이다. 어땠나요? 학생 역할을 했던 다른 예비 교사들에게 모의 수업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수업 내용의 핵심을 정확하게 정리해서 잘 전달한 것 같습니다.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자신감 있는 태도가 좋았습니다. 이런 평가가 이어지고 나는 다시 예비 교사들에게 묻는다. 그런데 이 수업에서 빠진 게 하나 있어요. 그건 뭘까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예비 교사들에게 나는 작은 공을 하나 던진다. 던지고 받고, 던지고 받고.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공을 주고받는다. 난데없는 캐치볼에 황당해하는 예비 교사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까 여러분들이 봤던 모의 수업에서 빠져 있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말을 던지고 받는 과정.
여러분은 지식을 잘 포장된 상자 안에 있는 네모반듯한 내용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 그렇다면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로서 여러분의 임무는 그 상자를 있는 그대로 잘 전달하는 것이겠죠. 내용물을 더 그럴싸하게 재포장하거나, 아니면 부피가 큰 내용물을 다시 나눠 담는 것, 혹은 포장을 직접 뜯어서 그 내용물이 뭔지 보여주면서 '한번 드셔 보실라우?'라고 말하는 것이 여러분의 역할 중 하나이겠네요. 그런데 그런 건 일타강사나 유튜버가 압도적으로 잘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일타강사가 아니고, 일타강사가 절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해내야 합니다.
한국어 수업 대화를 분석하다 보면 수업이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는 어떤 답을 확인하기 위해서, 또는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일타강사처럼 시원시원하고 깔끔한 강속구를 던지지 않는다. 공을 던질 때 보란 듯이 온갖 기교를 부리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학생들이 받을 수 있는 속도와 리듬으로 던진다. 학생들의 어설픈 공도 기꺼이 달려가 몸을 구르며 받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기다린다. 천천히 던지고 천천히 받고. 그런 캐치볼 속에서 일종의 유대감의 공동체가 생겨난다. 이 공동체 안에서 지식은 교사에게서 학생에게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지식은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조율되어 새롭게 생성된다. 이렇게 캐치볼은 학생들을 지식의 생산자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학생들은 서툴지만 자기만의 한국어로 대화를 하게 된다. 이런 수업을 만나면 나는 전율한다.
일타강사가 말 그대로 스타처럼 추앙받는 사회에서는 이런 교실, 이런 수업은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치처럼 보일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지식을 규격화된 상품으로, 교육을 그 상품의 배송 과정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상품의 배송은 빠를수록 좋다. 이런 교육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교실은, 교실 안에서 만들어지는 지식의 공동체는, 그 공동체를 만드는 교사는 중요하지 않다. 로켓의 속도로 더 빠르게 더 많은 지식을 대량으로 배송할 수 있는 일타강사 하나면 충분하다고 믿으니까.
그러나 한국 사회가 택한 '지식 상품의 배송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식 상품을 전달받지만 그 상품을 반품해 버리고, 똑같은 상품으로 전달받기 위해 학원으로 간다. 학원에서도 제대로 그 상품을 전달받지 못하면 인강을 보면서 다시 그 상품을 전달받으려 한다. 분명 배송은 완료되었다는데 물건을 받은 사람이 없다. 참으로 효율적인 배송 시스템이다.
애초에 이 배송 시스템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식이란 혼자서 사용하는 상품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재구성해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말하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한국어 문법은 학습자가 속한 교실이든 지역사회든 특정 공동체 안에서 사용되어야만 자신의 것이 된다. 수학의 난제는 고고한 한 명의 천재에 의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들의 협업을 통해 해결된다.
근래 교육계에서는 에듀테크라는 말이 유행인 듯하다. 공교육에서는 '미래', '혁신'이라는 단어에 어김없이 이 말이 따라붙는다. 에듀테크는 작금의 교육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처럼 그려진다. 빅데이터로 학생의 상태를 분석하여 맞춤형으로 지식을 제공할 것이니 교사의 역할도 달라질 것(사실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는다. 그러나 '이러닝', '스마트러닝'이라는 텅 빈 구호가 우리의 교육을 구원하지 못한 것처럼, '에듀테크'도 교육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에듀테크의 이름으로 제시되는 수많은 전망들은 지식은 상품이고 교육은 시장이라는 전제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 위에서는 아무리 화려한 에듀테크라 할지라도 손으로 하면 되는 물병 따르기를 복잡하고 어지러운 기계 장치를 통해 행하는 골드버그 장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에듀테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공지능이니, 가상현실이니, 메타버스니 하는 것들이 아니다. 진짜 에듀테크는 교실 안에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교사들의 캐치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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