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 글로리어스 트웰프스
여름이 일찍 저무는 스코틀랜드 고지의 8월은 헤더가 연보랏빛 꽃망울을 여는 때다. 헤더는 추위에 강하고 척박한 산성토양에서도 지천으로 자라는 관목. 헤더 꽃은 양봉가들의 값진 밀원이다. 헤더 꿀은 영국서 유기농 공식인증을 받을 수 있는 고급 꿀이어서, 이언 플레밍의 소설 속 ‘007’도 아침마다 그 꿀을 챙겨 먹곤 했다.
헤더 관목은 들꿩의 일종인 뇌조가 알을 낳아 부화시키는 좋은 은신처이고, 연한 새싹은 어린 뇌조의 좋은 먹이도 된다. 야생 조류인 뇌조는 워낙 개체수가 많은 데다 웬만한 암탉보다 몸집이 크고 식용으로도 근사해서 사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냥감 중 하나로 꼽힌다. 음식 칼럼니스트 프랜시스 케이스도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세계 음식 재료 1001’에 뇌조 고기를 소개했다.
뇌조 새끼들이 웬만큼 자란 뒤인 매년 8월 12일은 영국과 웨일스의 ‘1831년 사냥법’ 이래 뇌조 사냥 시즌이 시작되는 날이다. 다수가 들뜬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린다는 이 날을, 영국의 사냥꾼들은 ‘글로리어스 트웰프스(Glorious Twelfth, 신나는 12일)’라 부른다. 일요일 사냥은 불법이므로, 12일이 일요일이면 ‘글로리어스 서틴스’가 되기도 한다. 스티브 벤보의 책 ‘도시 양봉’에는 영국의 양봉가라면 글로리어스 트웰프스 무렵에는 반드시 헤더 밭에 벌통을 두는 게 철칙이라고 쓰여 있다.
어쨌건 스코틀랜드 고지 농촌은 미국과 유럽, 호주 등지에서 찾아오는 사냥꾼들의 사냥허가 요금과 부대소득으로 연간 2,500만 파운드의 소득을 얻는다. 사냥터마다 1인당 허가비용은 다르지만 최적지의 경우 최대 하루 1만 파운드에 달하기도 한다. 그래서 농부들은 뇌조들의 은신처인 헤더 밭을 더 잘 보존하고, 어린 뇌조들을 위해 연한 어린잎이 잘 자라도록 거친 줄기를 다듬어 주는 노고도 아끼지 않는다.
동물보호단체의 반대와 구제역 등 가축 전염병으로 인한 이동 통제 등 여러 변수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뇌조 사냥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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