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불편한 10대 여성
편집자주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뜻의 밈인 '무물'을 아시나요. 한국일보 허스펙티브가 성평등을 주제로 한 ‘무물 콘텐츠’를 격주 금요일마다 연재합니다. ‘대체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일상에서 흔하게 겪을 법한 다양한 고민 상황을 통해, 함께 성평등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뎌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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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여고를 다니고 있는 10대 학생입니다. 학교에서는 페미니즘 동아리에 소속돼 교내 캠페인 활동을 벌이거나 독서토론을 합니다.
최근 동아리 시간에 '성중립 화장실'을 두고 다른 친구들과 논쟁이 격렬하게 붙었어요. 저는 여성의 안전을 이유로 "성중립 화장실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여러 친구들이 저를 두고 "성소수자를 혐오한다"고 반박했어요. 동아리 안에서 혐오 발언은 용인될 수 없다며 경고까지 받았어요.
저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경우도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생긴 일이잖아요. 트랜스젠더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드나드는 화장실이 생기면 여성들은 불법촬영이나 성폭력 같은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커지지 않을까요. 성중립 화장실을 '모두의 화장실'이라고도 부르지만, 여성들은 쉽게 사용하지 못할 것이 뻔한데 어떻게 이것이 모두를 위한 화장실인가요.
평소 여성 인권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던 동아리였던 만큼, 거리낌 없이 제 소신을 밝혔을 뿐인데 친구들에게 한순간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으로 찍혀 답답한 마음입니다. (최궁금·가명·학생·18)
A. 대학 입시만으로도 한참 시간이 부족한 시기, 페미니즘 동아리 활동을 할 정도로 여성 인권에 진심인 궁금님의 열정에 우선 응원의 마음부터 보내요. 갑작스럽게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으로 지적을 받아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설 것입니다. 궁금님의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앞서,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개념부터 차곡차곡 짚고 넘어가 볼까요.
한국 사회는 공중화장실에 관한 법률을 통해 공공화장실의 '성별 분리'를 법제화하고 있어요. 그런데 혹시 '공중화장실'이 포함하지 못하는 '공중'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예를 들어 성별이 같지 않은 장애인과 활동보조인, 어린 딸을 동반한 아버지 등은 기존의 성별 구분 화장실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트랜스젠더는 공중화장실에서 배제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결과에 의하면, 트랜스젠더의 44.2%가 공중화장실 이용 시 '불쾌한 시선' '모욕적 발언' 등 차별적 경험을 겪었다고 해요. 물리적 폭력을 당한 경우도 5.1%에 달했고요. 그렇다 보니 '최근 5년 내 공중화장실 이용을 포기한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 비율이 67.6%에 달합니다.
공중화장실을 사용하는 게 꺼려지는 이들은 외출 시 요의를 참으려고 물조차 극도로 제한합니다. 이따금 화장실만 사용하려고 카페나 음식점에서 불필요한 소비를 하기도 해요. 안타깝게도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당연히 '인권'의 영역이어야 할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Q. 공중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충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논의에서 충분히 반영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A. "화장실에서 성별 구분을 없앴을 때 여성들이 느낄 불안은 성차별적 구조에서 계속 발생하는 성폭력의 문제에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여성들의 불안감은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별 구분된 화장실 앞에서 트랜스젠더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사용 시 겪는 차별 역시 트랜스젠더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변호사가 2020년 8월 '여/성이론'에 발표한 글 '모두를 위한 화장실, 화장실의 평등'의 일부입니다. 화장실 사용에 있어 여성이 느끼는 불안감 그리고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차별 모두 개인이 극복할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고 쾌적하게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 구조라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화장실의 성별 구분을 없애고,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했을 때 정말로 성폭력 범죄가 증가할까요. 박 변호사에 따르면 "유럽과 미국 일부 주 등에는 성 중립적인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이로 인해 성폭력 범죄가 증가했다는 사례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차별금지법에 의해 트랜스젠더가 성별 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국가의 경우도 그로 인해 성폭력 범죄가 더 발생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2018년 UCLA 로스쿨에서도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는데요. 트랜스젠더에게 포용적인 성중립 공공시설(화장실, 라커룸, 탈의실)을 조례로 의무화한 지자체와 그렇지 않은 지자체를 비교했더니, 차별 없는 공공시설 사용 보장과 범죄율에 관계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공공시설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와 실제 범죄 신고 사이의 관계를 엄격하게 측정한 최초의 연구였어요.
Q. 아무리 연구 결과가 그렇다고 한들, 살면서 단 한 번도 모두에게 열린 화장실을 본 적이 없는 저로선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걸요.
A. 우리는 누구나 익숙하지 않거나 생소한 것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낍니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중립 화장실을 볼 기회가 없었던 궁금님으로선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해요. 하지만 합리적 근거 없이 편견을 갖고 그것을 주변에 확산하는 과정에서 '혐오'가 생겨나요. 차별과 배제가 없는 화장실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실제 현장을 살펴볼까요.
올 3월 국내 대학 가운데 최초로 성공회대가 교내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했어요. 성별뿐만 아니라 장애, 성적지향, 성정체성 등과 상관 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설계된 화장실이죠. 화장실 앞 표지판에는 성별 구분 외에도 성중립 표현, 휠체어를 탄 장애인, 기저귀를 가는 인물 등 다양한 상징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장애인, 아이도 쉽게 누를 수 있도록 출입 버튼이 낮게 설치되어 있고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의 화장실 접근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이 화장실에는 어른 허리 높이에 아기를 눕힐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 누구라도 아기 기저귀를 쉽게 갈아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생리컵 사용자들을 위해 양변기 옆에 세면대를 설치했어요.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장은 "미국의 경우 건물 내 모든 화장실을 '모두의 화장실'로 바꾸기보다, 휠체어 접근성이 가장 좋은 1층에 설치하고 2층 이상에는 기존 성별 구분 화장실을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다"며 "성공회대는 딱 한 곳에만 모두의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는데, 혹여 모두의 화장실을 사용하는 게 불편하다면 다른 성별 구분 화장실을 사용하는 선택이 유효하다"고 설명했어요.
더 나아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점점 늘어나고, 이로 인해 차별과 배제를 만들어 내지 않는 문화가 보편적인 풍경으로 자리 잡는다면 궁금님이 느끼는 낯섦과 두려움도 부지불식간에 사라질 것이라 강조합니다. 김 소장은 "시청, 지하철역 같은 공공시설부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설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여성 화장실이 없는 시설이 많았어요. 여성은 사회생활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지금도 일부 여군은 편히 사용할 화장실이 없어 훈련 도중 물을 마시지 않는대요. 건설 현장에 보장되지 않는 여성 화장실은 어떻고요. 화장실 갈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누가 이 사회의 주인인지, 누가 이 사회에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겁니다."
※ 참고 문헌
-박한희(2020). 모두를 위한 화장실, 화장실의 평등. 여/성이론. 통권 제42호. 6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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