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형의 응시]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
학교 들어가기 전 별다른 공식 교육을 못 받은 아이와 영어유치원을 다닌 아이는 출발선이 다르다. 어느 어린이집, 어느 유치원을 다니느냐에 따라 경험치가 달라진다. 여기서부터 학력 격차와 불평등이 시작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누구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했던 이 문제에 대해 사회적 논의의 물꼬를 트고자 지난해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내 아동돌봄분과위원회에서 전문가들이 정책연구를 시작했다. 6개월여 동안 연구한 결과물인 ‘K-학년제 도입의 쟁점과 전망’ 보고서가 위원회 간행물인 이슈페이퍼 7월호에 실렸다.
그런데 보고서가 공개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박순애 전 교육부 장관이 초등학교 입학을 1년 당기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느닷없이 발표해버렸다. 아무리 교육정책 경험이 없어도 이번 보고서라도 봤다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란 걸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K-학년제’의 K는 유치원을 뜻하는 영단어(Kindergarten)의 앞 글자다. 취학 전 특정 시기의 유아교육을 의무화하자는 의미로 오래전 만들어진 용어다. 박 전 장관이 갑작스럽게 내놓은 취학연령 하향과 다르다.
아동돌봄분과위원회의 K-학년제 연구팀을 이끈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아동 관련 정책을 약 20년간 연구해온 그는 아동 시기의 격차 문제는 교육만이 아니라 발달과 돌봄을 반드시 함께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격차를 줄이기 위해 취학 전 유아기 교육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연구팀 전문가들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연구팀은 의무화를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하나의 방안을 보고서에 명시하지 않았다. 대신 가능한 여러 방안의 장단점을 분석하며 최선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유보통합, 돌봄, 교육과정 개편 등과 연결되기 때문에 민감하고 폭발력이 큰 사안임을 감안했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그런데 전 교육수장의 실책 때문에 논의의 장을 열기조차 조심스러워진 상황이다. “교육부의 섣부른 정책 발표 탓에 이해관계자들의 거부감이 너무 커진 바람에 진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것 같아 답답하다”고 정 교수는 한탄했다.
유보통합 필요성 공감대 있어
-박 전 장관의 갑작스러운 취학연령 하향 발표에 모두가 깜짝 놀랐고 당황했다. 어떤 점이 가장 문제였다고 봤나.
“한 학년에 만 6세와 5세를 함께 입학시킨다는 건 사실상 조기입학을 확대하겠다는 의미였다. 영·유아 시기에는 월령으로도 나이를 센다. 다달이 발달 단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월령이 12개월 넘게 차이 나는 아이들을 발달 편차를 무시하고 한 교실에 앉아 공부를 시킨다니 반대가 많을 수밖에 없다. 교육 격차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달 차이를 무시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책을 시행하면 의도된 효과도 생기지만, 의도되지 않은 현상도 나타난다. 취학연령을 앞당기면 부모의 경력 단절과 아동의 사교육 진입 시점도 당겨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 현상들을 어떻게 할지 전혀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책만 덜렁 던져놓았다.
유아 의무교육은 이를 둘러싼 이슈가 워낙 많은 만큼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교육부가 준비 안 된 정책을 덜컥 발표하는 바람에 학부모들을 크게 자극해버렸다. 차근차근 논의를 준비해온 전문가들 입장에선 이렇게 생긴 거부감 때문에 또 몇 년을 흘려 보내면서 논의가 지연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 같아 우려가 크다.”
-유아기 교육 의무화 논의를 꼭 지금 시작해야 하나. 지금이 적기라고 보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현재 국내 영·유아 교육과 돌봄은 일정 부분을 나라가 지원한다. 심지어 유치원, 어린이집 둘 다 다니지 않는 약 10%의 아이들에게도 가정양육수당을 지급한다. 문제는 양육수당을 상위계층은 영어유치원 보내는 데, 하위계층은 생활비에 쓴다는 점이다. 경제력에 따라 양육수당을 달리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공정과 불평등 아닌가. 교육 격차가 여기서부터 만들어진다. 취학 전 집에 방치된 아이와 영어유치원을 다니며 ‘달려온’ 아이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어릴 때는 그 격차가 작아 보여도 그대로 성인이 되면 어마어마하게 벌어진다. 격차를 줄이려면 일정 기간의 유아기 교육을 의무화해야 하고, 그게 K-학년제의 핵심이다.
만 3~5세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다니면 공통적으로 누리과정에 따라 교육을 받는다. 유아기 교육은 내용 면에서 이미 통합돼 있는 셈이다. 그러나 유치원은 교육부, 어린이집은 보건복지부로 주무 부처가 이원화해 있어 혼선과 비효율이 적지 않다. ‘유보통합’의 필요성이 그래서 진작부터 제기돼왔다. 유아교육 의무화는 유보통합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번 K-학년제 연구도 유보통합을 위한 마중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간 많은 전문가들이 유보통합에 애써왔지만 부처 간, 이해집단 간 이견으로 번번이 가로막혔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관련 교수와 교사가 배출되는 경로가 다르고, 기관마다 설립 유형도, 시설 수준도 다르다 보니 좀처럼 논의가 진척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아이들이 줄면서 현장 분위기가 눈에 띄게 바뀌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유치원도 어린이집도 모두 생존을 걱정하게 될 거란 위기감이 커졌다. 지난 대선 때 주요 후보들이 유보통합을 공약한 걸 보면 분위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지금이 유보통합과 함께 유아교육 의무화 논의를 시작할 적기인 이유다.”
-그런 배경과 고민들을 교육부와 사전에 공유하지 않았나. K-학년제든 유보통합이든 취학연령이든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교육부 간 공감대가 있었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나빠지진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든다.
“이번 취학연령 하향 발표 때는 교육부가 우리 보고서를 전혀 참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동 정책은 교육 쪽에서만 생각하면 안 되는 측면도 있는데, 너무 성급했다. 사실 문재인 정부 때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교육부에 초등학교 하교 시간을 오후 3시 정도로 늦추는 방안을 만들라고 권고한 적이 있다. 방과후 돌봄을 확대하거나 수업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고려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연간 수업시간은 655시간으로, 799시간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평균보다 훨씬 적다(2019년 기준). 주요국들의 초등 저학년 정규수업이 대체로 오후 3시 이후 끝나는 데 비해 우리 초등학교 1학년은 점심을 먹어도 오후 1시~1시 30분에 하교한다. 3~5시에 하원하는 유치원생들보다 집에 빨리 온다.
그러나 당시 교육부는 교사와 일부 학부모들 반대를 이유로 위원회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걸 반대했고, 부모들은 어린이는 학교에 앉혀두기보다 놀려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교 후 자녀를 놀리기는커녕 학원 보내는 부모가 많다는 건 모두가 안다. 결국 하교 시간 조정은 실패했다. 저학년 돌봄을 좀 더 체계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랬던 마당에 돌봄이 더 필요한 만 5세까지 학교에 보내겠단 정책이 불쑥 튀어나온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무상보육 취지부터 살려보자
-선진국 상황은 어떤가.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취학 전 1년의 의무교육이 보편화하는 추세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만 5세, 룩셈부르크는 4세, 헝가리는 3세에 각각 의무교육을 시작한다. 프랑스는 2019년부터 3~5세 의무교육을 시작했고, 일본도 유아 의무교육 도입 논의를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이후 교육계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만 5세 의무교육 제안이 여러 차례 나왔다. 구체적인 방안은 조금씩 달랐지만 유아교육의 기회 균등과 격차 해소를 이유로 들었던 점은 공통적이다. 또 OECD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이원화한 나라는 소수에 불과하다.”
-현행 교육체계에서 만 5세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방안은 교육부의 실책으로 논의 테이블에도 못 오른 채 물 건너갔다. 유아교육 의무화를 그나마 연착륙시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뭐라고 보나.
“지금의 유치원·어린이집 체계를 크게 건드리지 않고 일단 만 5세 교육부터 의무화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무상보육 취지에 맞게 운영되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다. 가령 지금은 기본적인 유치원비나 보육료는 지원받지만, 각종 명목으로 내야 하는 특별활동비가 기관마다 지역마다 천차만별이다. 학부모들의 이런 추가 비용 부담부터 줄이는 게 유아교육 의무화, 유보통합의 출발점이 되면 어떨까. 그리고 한편에선 유치원, 어린이집의 규모와 안전성 등 인프라를 의무교육 시설 기준에 맞도록 끌어올리면서, 교사 자격이나 배출 경로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이끌어내는 것이다. 현재 유치원 교사를 배출하는 기관은 전문대와 4년제 대학이 혼재돼 있어 양성 기간이 2~4년으로 다르다. 어린이집에서 주로 일하는 보육교사 양성 기관과 기간은 더 다양하다.
만 5세의 누리과정 교육을 의무화한다면 초등교육과정과의 연계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유아들의 누리과정은 경험과 놀이 중심인 반면 초등학생 교육과정은 학습이 우선이다. 따로따로 개발, 운영되고 있어서 내용이 서로 연결되지 않거나 중복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5세와 6세의 의무교육이 서로 연속성을 갖도록 장기적으로 조정해가야 한다. 유치원이건 학교건 일반교사와 돌봄교사 간 처우 격차가 너무 큰 상황을 개선할 방법도 찾아야 한다. 아이들이 어릴수록 교육과 돌봄이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도 돌봄 업무를 쉽게 폄하하고, 사회적 가치가 낮다고 여기는 게 현실이다.”
완결성 있는 돌봄체계 마련이 관건
-부모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바로 돌봄이다. 유아나 초등학생을 키우는 부모 상당수가 돌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사교육에 노출되는 데도 결국 돌봄 인프라 부재가 큰 몫을 한다. 유아교육 의무화 역시 충분한 돌봄이 뒷받침될 수 있느냐가 관건 아닌가.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분석한 2020년 연구에 따르면 경제활동이 하락하는 시기가 35~49세로 나타났다. 초등학교 1학년을 키우는 엄마의 평균 연령이 같은 해 기준 38.8세다. 주로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 시기에 여성들이 경제활동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의미다. 준비되지 않은 유아교육 의무화는 자칫 돌봄 대란을 부를 수 있다. 교육과정을 체계화한 것처럼 돌봄도 체계화해야 한다.
올해 1월 기준 만 5세 이하 아동의 연령별 인구 수가 25만(0세)~40만(5세) 명인 걸 감안하면 유아교육 의무화를 시행할 경우 저출산 현상을 반영해도 최소 20만 명 이상의 돌봄 수요가 추가로 생긴다는 예측이 이번 보고서에 담겼다. 현재 유치원 돌봄은 대개 방과후전담사 채용으로 운영된다. 같은 유치원 정교사 자격이 있어도 일반교사와 방과후전담사의 임금 격차가 큰 데다 업무 분장을 놓고 분쟁까지 적잖이 생기는 실정이다. 유치원에서 돌봄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방과후전담사 운영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유아교육 의무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완결성 있는 돌봄 체계 마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과 돌봄 분야에는 워낙 다양한 직역들이 엮인 터라 어떤 정책을 내놔도 반발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어이없는 실책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마저 땅에 떨어졌다. 아동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려면 정부가 무엇부터 해야 하나.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갈 대학이 결정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아동 격차가 크다. 당연히 격차를 줄여야 하고,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아이가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 그 큰 그림을 외면하고 각자의 직역 중심으로만 문제를 바라보는 건 곤란하다. 문제를 대하는 입장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다르고, 일반과 돌봄교사가 다르고, 교사와 학부모가 다르고, 유아교육학과와 아동가족학과가 다르고, 교육부와 보건복지부가 다른 건 공급자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동 격차의 실례와 현황을 데이터에 근거해서 정부가 적나라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유아교육을 의무화할지 여부부터 공론화하고 나서 차례차례 다음 단계를 논의 테이블에 올리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초·중·고교 교육과정 개편으로도 이어져야 할 텐데, 그렇게까지는 이번 정부가 진행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발은 떼놓아야 한다. 지금 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격차는 계속 벌어질 게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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