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7일로 취임 100일을 맞았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한미정상회담, 6·1 지방선거 등 굵직한 이벤트가 지나간 숨 가쁜 시간이었다. 자유, 공정과 상식의 가치를 앞세우며 취임 초 53%까지 지지율이 올랐지만 100일도 되지 않아 20%대로 주저앉았다. 대선 당시의 득표율(48.6%)을 크게 밑도는 상황에 부닥친 것은 인사 편중, 집권여당 내홍, 정책 혼선 등으로 중도층은 물론 주요 지지층에서조차 기대감이 식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정 동력 회복을 위한 쇄신과 반전 카드가 절실한 상황이다. 실망과 걱정, 긍정과 기대가 엇갈리는 상황 속에서 윤 대통령의 취임 100일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아봤다.
탈청와대 : 변화를 위한 과감한 시도
윤석열 정부의 100일을 상징하는 첫 번째 단어는 ‘탈청와대’다. 취임 즉시 대통령의 상징이던 청와대를 나와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며 역대 대통령들이 실천하지 못한 공약을 단번에 이뤄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을 바꿔 ‘용산 시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론 수렴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집무실 이전이라는 정치적 실험은 결과적으로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예컨대 공간이 바뀌자 대통령실의 업무 스타일에 변화가 생겼다. 용산 대통령실은 한 건물 안에 대통령 집무실과 참모진 사무실, 기자실, 회의ㆍ접견실 등이 모여 있다. 청와대가 본관을 비롯해 춘추관(기자실), 여민관(비서실 업무동), 영빈관 등 여러 건물로 분산 배치됐던 것과 대비된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거리가 가까워지다 보니 소통이 원활해졌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과거 보수 정권 청와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대통령실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수시로 즉각 보고가 가능하니 업무면에서 상당히 유연해졌고, 참모들 입장에선 업무 긴장도도 높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출근길에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유례 없는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을 정례화한 것도 '탈청와대'가 가져온 부산물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다음 날인 5월 11일부터 16일까지 총 36회 기자들과 문답을 나눴다. 대통령의 발언과 표정, 제스처를 언론과 국민들에 노출하고, 판단을 맡기는 시도 자체는 용산 이전 못지 않은 획기적 변화다.
하지만 마냥 긍정적이었던 건 아니다. 격식 없는 도어스테핑은 윤 대통령의 정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종종 정책 혼란을 가져왔고 때로는 불통 이미지도 낳았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역대 대통령들이 경호 문제나 시민 불편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청와대 이전을 추진력 있게 실천한 것에 높은 평가를 할 수 있다”면서도 “의견 수렴을 하는 것이 아닌, 대통령의 생각 차이만 확인하는 식의 도어스테핑을 소통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노(NO)브랜드 : 비전과 방향성 부재
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관통하는 두 번째 키워드는 '노브랜드'다. “노브랜드가 브랜드”라는 윤 대통령의 평소 신념처럼 윤석열 정부는 ‘참여정부’ ‘국민의 정부’라는 네이밍이나 ‘사람이 먼저다’(문재인 정부)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지 않는다. 한 여권 관계자는 “창조경제 등 과거 정부가 부풀린 브랜드들은 모두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며 “윤 대통령이 늘 강조하는 것은 보여주기보다는 일과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받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브랜드 기조는 정책 혼선과 윤석열 정부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한 원인으로도 꼽힌다. 가령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재정 건전성을 내세웠지만 최근 발표한 정부 세제안은 오히려 감세에 초점이 맞춰지자 도처에서 윤석열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점이 뭔지 모르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교육부 업무보고 과정에서 불쑥 튀어나온 ‘만 5세 초등학교 취학’ 정책은 철학과 소통의 부재가 부른 참사라는 평가다. 5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밝힌 연금ㆍ노동ㆍ교육 등 3대 개혁은 아직 윤곽조차 잡지 못했다.
취임 전 ‘공정과 상식’이라는 모토를 내세웠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점도 노브랜드 기조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공정과 상식' 가치마저 검찰ㆍ모피아(재정ㆍ금융 관료+마피아)ㆍMB정부ㆍ서오남(서울대 출신의 50대 이상 남성)에 편중된 인사로 인해 의미가 퇴색했다.
대통령실은 뒤늦게 대통령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PI(President Identity) 작업에 나선다는 방침이지만 홍보기획비서관 인선이 최근에야 마무리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노동ㆍ교육ㆍ연금 개혁은 국정 브랜드로 충분히 살려야 하는 아이템인데도 제대로 후속작업이 되지 않고 있다”며 “내놓은 정책조차도 장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마이웨이 : 야당과 거리두는 대통령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뭐에 한번 꽂히면 뒤도 안 보고 직진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또 '한 번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런 '마이웨이' 리더십은 국정 동력을 뒷받침하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지만, 자칫하면 오만과 독선으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이런 스타일은 이미 두 가지 형태로 국정에 투영되고 있다. 먼저 윤 대통령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기치로 내세웠던 '반문재인' 기조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국민 통합이라는 국정 운영의 핵심 가치는 이미 실종된 모습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와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통합과 협치를 언급하지 않았다.
반문재인으로 가는 마이웨이 기조는 여소야대 지형을 뚫고 나가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프레임으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잇단 부실 인사 지적에 내놓은 "전 정권 장관 중에 훌륭한 사람 봤느냐"는 윤 대통령의 답변이 대표적이다. 또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탈북 어민 북송 사건 수사로 시작된 '전 정권과의 전쟁’도 예상을 뛰어넘는 수위라는 평가가 많다.
그 결과가 협치의 실종이다. 취임 100일을 맞이할 때까지도 대통령과 야당 대표 회동은 성사되지 않았다. 문재인·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이 각각 취임 10일, 한 달 반, 두 달 반 만에 여야 원내대표 혹은 당대표와 회동한 것과 비교된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의회 민주주의에선 입법을 통해야 주요 정책 실현이 가능한 만큼 대통령은 의회 내 지지세력을 늘려나가는 게 중요하다"면서 "지금까지 모습을 보면, 윤 대통령은 '야당 협조를 구하는 것'이 본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은 기존 여의도 정치에 빚진 것이 없어 자유롭다. 지지율이 떨어져도, 여당에 내홍이 벌어져도 마이웨이가 계속될 수 있는 건 과거에 얽매일 필요 없는 정치 초보라는 이력 때문이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윤 대통령의 진정성이 인정 받으면 국정이 순항할 수도 있지만,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자칫 정치의 실종을 낳을 수 있다. 초유의 당대표 징계 사태와 비상대책위원회 전환으로 혼돈에 빠진 집권여당을 수습하기보다 먼 발치에서 거리만 두는 모습에서 이런 단점이 드러난다.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이른바 '내부 총질' 문자가 노출돼 당 내홍에 윤 대통령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다"며 "무대응 기조로 침묵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나서 어느 방향이든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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