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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계곡 건너는 스타트업… "벤처 전문은행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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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계곡 건너는 스타트업… "벤처 전문은행 절실"

입력
2022.08.18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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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로 투자 급감... 7월 70% 하락
"장부·물적 담보 대신 성장성 봐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이 좋은 대안

고장 나거나 버려진 장난감을 순환시키는 소셜벤처 '코끼리공장'을 운영하는 이채진 대표는 요즘 '대출과의 전쟁'에 여념이 없다.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던 그는 아동복지시설 장난감을 수리하는 봉사활동을 계기로 2014년 코끼리공장을 설립했고, 현재는 장난감에 쓰이는 플라스틱 소재 재생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전국 수천 곳 아동복지시설에서 쏟아지는 장난감들을 처리하려면 수십억 원의 설비 투자가 필수적인데, 자금을 당겨오기가 쉽지 않다.

이 대표는 10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용보증기금,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민간은행 법인 대출까지 총동원해 간신히 공장을 매입하긴 했지만 아직 역부족"이라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장을 본격 가동하면 매출이 지금보다 25배나 늘지만, 이런 전망만으로 보수적 금융기관을 설득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채진 코끼리공장 대표가 1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사업 자금을 확보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이현주 기자

이채진 코끼리공장 대표가 1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사업 자금을 확보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이현주 기자


돈줄 마르는 스타트업 시장

그간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술을 갖춘 기업에게 창업 자금을 내주고 성장을 돕는 역할은 주로 벤처캐피털(VC)의 몫이었다. 그러나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싹수 있는 기업을 찾아 선제적인 투자를 해 왔던 VC들이 지갑을 닫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번지고 있다. 스타트업 민관협력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집계한 지난달 스타트업 총투자금은 약 8,368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달(3조659억 원)보다 72.7% 급감했다. 6월 투자금(1조3,691억 원)과 비교해서도 38.9%나 쪼그라든 규모다.

업계가 호황이었을 때는 성장성만 입증하면 연쇄적 후속 투자를 유치해 몸집을 불리는 게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창업 아이템을 보유한 스타트업이 종잣돈(시드머니)으로 시작해 순차적으로 투자를 유치한 뒤 기업을 매각하거나 상장하면서 기업 외형을 키우는 사례가 이어졌다.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이 2011년 3억 원의 시드머니를 유치한 뒤, 2019년 12월 독일 기업에 4조 원대로 회사를 넘긴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초저금리 시대 시중에 풀렸던 유동성이 위축되면서, 이제는 스타트업이 투자를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전략도 불투명해졌다. 기업들이 원리금 상환 부담에도 대출을 고려하는 건 이 때문이다. 외부 투자를 수차례 유치하는 데 성공했던 한 스타트업의 관계자는 "한국은 초기 스타트업을 위한 투자는 풍부하지만 가시적 성장을 눈앞에 둔 중·후기 스타트업들은 보릿고개를 넘기 어려워 생존 위기에 내몰린다"고 우려했다. 초반에 힘차게 시작했지만 창업 3~5년 차 정도에 매출을 비약적으로 늘리지 못해 생존 위기에 몰리는 죽음의 계곡(the Valley of Death) 현상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ICT 분야 스타트업 단계별 투자 금액.

ICT 분야 스타트업 단계별 투자 금액.


가능성을 보지 않으려는 일반은행

하지만 대출로 눈을 돌려도 은행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다. 사단법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코스포)의 한 회원사 관계자는 "국내 민간은행의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도는 제로에 가깝다"면서 "성장성이나 미래가치는 제쳐 두고 현재 재무제표만 보고 대출 불가 판정을 내린다"고 꼬집었다. 한국일보가 코스포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설문에 응답한 포럼 회원사의 97%가 "국내 벤처·스타트업 생태계 성장을 위해 민간은행 대출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 때문에 재무제표나 물적 담보 대신 기술력이나 미래 성장성을 전문적으로 판단해 스타트업에 대출해 주는 '벤처 전문은행'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83년 문을 연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모범적인 사례다. SVB의 대출은 △기술 등 무형 자산을 담보로 인정해 주는 대신위험도를 고려해 일반은행보다 이율이 상대적으로 높고필요한 경우 해당 기업의 지분 인수를 보장하는 조건을 걸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은행 대출과 다르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최근 낸 보고서('SVB그룹 모델의 국내 도입 가능성 진단')에 따르면, SVB는 스타트업 투자를 전문적으로 하면서도 미국 내 은행 소유 금융그룹 중 자산 기준 13위에 오를 정도로 규모가 크다. 대출 회수율도 대형 VC에 비해 월등히 높다.

나수미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상업은행은 주로 담보대출이나 보증대출을 실행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어, 벤처·스타트업의 미래 가능성을 평가해 대출하는 역량은 아직 부족하다"며 "실리콘밸리처럼 민간 주도 대출 제도가 도입되면 벤처 생태계가 한 단계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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