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우드스톡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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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바로 보기 | 3부작 | 18세 이상
1999년 4월 20일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젊은이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가 절실했다. 1969년 열렸던 우드스톡 페스티벌 같은 축제의 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우드스톡 공동 기획자 마이클 랭이 나섰다. 1999년판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개최해 청년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싶었다.
①모두가 기다렸던 음악 축제
1969년 8월 미국 뉴욕주에서 개최된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많은 청춘들에게 희망을 안겼다. 베트남전과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등의 암살로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하려 했다. 히피 문화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도약대 삼아 정점에 이르렀다.
199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다시 열린다고 하자 젊은이들은 들떴다. 3일 동안 음악의 세례 속에 자유분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언론은 우드스톡이 지닌 의미와 잠재력을 알았다. MTV는 아예 독점 중계방송을 준비하며 축제를 대비했다.
②출발부터 심상치 않던 조짐
출발은 순조롭지 않았다. 1994년 열렸던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적자를 봤기 때문이다. 랭은 여러 대규모 콘서트를 성공시킨 존 쉐어와 손을 잡았다. 주변에선 만류했으나 쉐어는 돈을 벌 자신이 있었다. 그의 무기는 비용절감이었다. 공연장은 폐쇄된 공군비행장으로 정했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바닥에서 낭만이 피어나기 어려웠으나 싸게 빌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공연은 예상대로 성공적이었다. 25만 명가량이 몰렸다. 랭과 쉐어는 많은 후원금을 받았고, 거액에 공연장 내 식료품 판매권을 넘겼다. 재앙의 씨앗이었다.
③탐욕과 낙관이 부른 재앙
첫날 행사는 대체로 순조로웠다. 유명 가수와 밴드들이 무대에 올라 열기를 끌어올렸다. 술과 약에 취한, 과격한 일부 관객들이 우려를 샀으나 대규모 축제에 언제나 있는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살인적인 물가에 더위가 겹치고, 자극적인 공연이 이어지면서 사랑과 평화의 축제는 폭력의 소용돌이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최 측은 낙관으로 일관하다 사태를 오판했다. 좋은 취지의 행사인 데다 우드스톡이 지닌 의미를 관객 모두 이해하리라 여겼다. 축제를 그저 해방공간으로만 여겨서 과격한 행위와 자유분방을 구분하지 않았던 관객들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 못한 것이다. 경비원 부족에 무더위 대책 부재, 성폭력에 대한 안일한 인식 등이 뒤섞이며 사랑과 평화의 축제는 난장판으로 돌변했다. 다큐멘터리는 당시 녹화 화면, 랭과 쉐어와의 인터뷰, 관객들의 증언 등을 통해 1999년 8월로 돌아간다.
※뷰+포인트
23년 전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치고는 당시 현장 영상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행사 스태프가 축제 준비부터 축제 모습까지 최대한 담으려고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다닌 덕이다. 행사 마지막 날 밤 관객들의 난동으로 전쟁터처럼 변한 무대 주변의 모습 등 사실감 넘치는 영상들이 인상적이다. 행사를 기획한 랭과 쉐어는 소수 나쁜 녀석들의 소행으로 치부했다. 행사 주최자로서의 책임감은 찾기 힘들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이후 다시는 열리지 못했다. 랭은 2019년 우드스톡 50주년을 맞아 행사를 기획했으나 주변 시선은 싸늘했다. 그는 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후 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평론가 94%, 시청자 79%
***한국일보 권장 지수: ★★★☆(★ 5개 만점, ☆ 반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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