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경기 성남 분당구의 조용한 주택가에 켜켜이 들어선 아홉 겹의 벽. 비밀의 미로성을 연상케 하며 시선을 훅 끄는 이 건물은 세련된 미술관이나 레스토랑이 아니다. 지난해 완공된 단독주택(대지면적 570㎡, 연면적 520㎡)으로 건축주 부부의 인생 2막을 위한 집이다. 현대적 조형미의 독특한 외양 못지않게 독립적 공간 창출의 기능성이 극대화한 이 주택엔 놀랍게도 한옥의 지혜도 담겼다. 아홉 겹 벽의 마술인 셈이다.
누구 못지않게 치열한 인생을 살아온 남편 김완승(62)씨. 1997년 외환위기 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자부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인생이었지만 포기한 것도 여럿이었다. 김씨는 "멈춰 서보니 내 나이가 벌써 예순을 넘어서고 지병도 생겼다"며 "남은 인생 동안 건강을 챙기면서 여유를 즐기기에 아파트보단 땅을 밟는 주택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씨 가족은 이 집을 짓기 전에도 같은 땅에서 주택 살이를 했다. 15년간 지내며 나름의 건축적 소회가 생긴 터. 그중 하나는 잔디 마당이 있는 전형적인 주택은 생활과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넓은 마당의 나무와 잔디를 관리하는 일은 피하고 싶은 노동이 됐고 담장을 넘어 들어오는 외부 시선도 신경 쓰였다. 습기와 추위에 약한 목조 주택의 불편함도 쌓여갔다. 잔디에서 뛰놀던 자녀들은 훌쩍 커서 각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을 원했다. 결국 옛집을 허물고 오랜 주택살이에 따라붙었던 아쉬움, 달라진 가족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 새집을 짓기로 했다. "은퇴 후에는 집이 곧 삶이 될 테니 일상을 풍요롭게 다듬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다른 가족들에겐 하나인 듯 분리된 공간이 됐으면 했죠."
벽이 만든 '집 속의 집', 한옥의 '채' 응용한 디자인
'같이 누리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집.' 설계를 맡은 조진만 건축가(조진만 건축사사무소 소장)는 건축주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벽과 창을 활용했다. 그는 "효과적으로 소통하면서도 사생활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 벽과 창이었다"며 "제한된 예산 안에서 벽의 변주를 건축적으로 얼마나 잘 풀어내는지가 관건이었다"고 했다.
건축가는 층별로 부부와 아들, 딸의 방을 배치하고 방 사이에 벽을 세웠다. 사각 박스 사이 사이에 높낮이가 미묘하게 다른 벽이 들어서자 마치 성채 같은 웅장한 외관이 만들어졌다. 건물 정면은 비례와 위엄이, 옆면은 육중한 부피감이 생겼다. 벽과 벽 사이에 생긴 넉넉한 테라스 공간에는 작은 정원을 조성해 여유를 더했다. 여러 겹의 벽으로 쌓아올린 요새 안으로 마당 딸린 '집 속의 집'이 만들어진 셈이다. .
이는 전통 한옥의 '채' 개념을 응용한 디자인이다. 한옥은 안채와 사랑채 등으로 공간을 나누고 그사이에 마당과 대청을 둬 다양한 기능을 부여한다. 조 소장은 "채와 채 사이에 빈 공간을 만들어 사생활을 확보한 한옥의 공간 구성을 응용했다"며 "방 외부에는 마당 격인 테라스를 두고 가족이 공유하는 서재와 거실을 대청처럼 방 사이에 배치해 다목적 공간을 마련했다"고 했다.
이는 나중에 자녀들이 결혼해 함께 살 것을 염두에 둔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각자 가정을 이루게 되면 각자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 독립적인 동선을 확보하는 게 중요해진다"며 "출입구도 두 개로 만들어 최대한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게 했다"고 덧붙였다.
가족들은 나란히 선 벽 사이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게 트이는 경험을 하고 있다. 외견상 높은 벽에 시야가 막혀 답답하지 않을까 싶지만 막상 집 안으로 들어가면 어느 한쪽으로 무리하게 열리거나 닫힌 느낌이 없어 시각적인 안정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조 소장은 "벽을 따라 만들어진 테라스는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면서도 주변 풍경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만들어준다"며 "사생활을 갖추면서도 내부와 외부를 연결해주는 완충지대"라고 말했다.
바깥 공기를 쐬는 시간도 늘었다. 피하고 싶은 외부의 시선은 피하고, 보고 싶은 풍경은 수시로 볼 수 있어 테라스나 마당 같은 야외 공간에 마음 편히 머무르게 됐다고 한다. 아들 방 앞의 테라스는 자주 홈 캠핑장으로도 변신한다. 건축주 김씨는 "아들이 친구들을 불러서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공간이 분리돼 있다 보니 고기를 구워도 모른다"고 했다.
'아홉 겹의 벽'이라는 파격 실험을 경험하고 있는 김씨는 "누구는 집이 갤러리 같다고 하는데 실제로 뚫린 벽에 맺힌 차경이 작품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며 "어떤 창으로는 하늘이 보이고, 어떤 창으로는 저 멀리 동네 어귀가 보인다"고 했다. 조 소장은 "벽과 창이 외부의 자연을 감상하는 다양한 프레임(액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안과 밖이 교감하는 이 집만의 어법"이라고 덧붙였다.
여백의 공간에 느리게 담기는 일상
집에는 주택살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요소들도 여기저기 숨어 있다. 뒷산을 배경으로 정원이 시원하게 펼쳐진 거실과 부엌은 건축주 부부가 오래전부터 꿈꾼 모습 그대로다. 건축가는 뒷산 풍경을 정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존 집과 마당의 위치를 정반대로 바꿨다. 조 소장은 "급경사의 땅이 안쪽으로 숲을 껴안고 있었는데 집과 인접한 등산로가 있어 프라이버시 측면에서 취약했다"며 "기존에 골목 쪽에 접했던 마당을 과감하게 집의 가장 안쪽으로 옮기고 경계 지점에 나무를 심어 외부 시선을 가렸더니 개방되면서도 아늑한 공간이 됐다"고 설명했다.
꼭 필요한 요소들로 알차게 구성한 공간도 만족도가 높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남편 김씨의 공간인 운동실이 있다. 그는 하루 한두 시간씩 각종 운동기구들로 채운 넉넉한 공간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운동에 매진한다. 맨 위층에는 기독교 신자인 아내를 위해 작은 기도실을 두고 옆에는 사철 화초를 가꿀 수 있는 온실을 만들었다. 이 공간에서 아내는 혼자만의 평화를 만끽한다고 한다.
완공 후 어느덧 일 년.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부부의 일상에도 비로소 느림의 여유가 찾아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정원에 혼자 나와 사색을 즐긴다는 김씨는 "젊은 날 숨 쉴 틈 없이 흘려 보냈던 시간을 이 집에선 느리게 흘러가도록 하고 싶었는데 바람대로 된 것 같다"며 "건강하게 일상을 누릴 일만 남았다"며 웃었다. 건축가가 화답했다. "집은 결국 사는 사람들의 일상으로 완성되죠. 부러 만들어놓은 집의 여백에 새로운 풍경과 이야기들이 채워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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