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 혼동이 부른 디지털 세대 문해력 논란
코로나 이후 청소년 문해력 급감은 사실
각종 조사에선 중장년 문해력이 청소년보다 낮아
관건은 어휘력...세대 격차 줄일 방안 고민해야
"사흘간 무운을 빌었는데 금일 또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최근 한 카페의 사과문에서 시작된 문해력 논란을 비꼰 온라인 유머다. 지난 20일 유명 인터넷만화(웹툰) 작가의 사인회를 열기로 한 카페에서 예약에 오류가 있었다며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린다"는 메시지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위터에 올렸고,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한자어 '심심(甚深)한'을 '지루한'으로 오해한 댓글이 달리면서 '디지털 세대의 문해력 논란'으로 번졌다.
해프닝으로 넘길 일에 '논란'이란 수식어가 붙은 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다. 지난 2020년 광복절 임시공휴일 지정 때는 '연휴가 사흘로 늘었다'는 보도에 "3일을 왜 사흘이라고 하냐, 사흘은 4일 아니냐"는 항의 댓글이 달렸고, 지난 대선에서는 "무운(武運)을 빈다"는 말을 '운이 없다(無運)'는 의미로 잘못 전달한 방송 뉴스가 화제를 모았다. 오늘을 뜻하는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알고 항의한 일도 있었다. '심심한 사과'로 또 한번 '요즘 젊은 것들'의 문해력이 도마에 오르며 기존 해프닝까지 엮은 유머가 온라인에서 떠도는 셈이다.
디지털 세대 문해력, 정말 문제적일까?
'심심한 사과' 해프닝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①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소통이 어려울 만큼 퇴화되고 있다는 것과, ②모르면 사전 찾아보면 될 일을 '왜 어려운 말 쓰냐'고 화부터 낸 젊은 층의 태도가 문제라는 것.
'요즘 세대 문해력이 이전보다 떨어진다'는 주장은 세대 기준을 청소년으로 좁히면 일견 맞는 말이다. 27일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우리나라 학생들의 국어 성적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해마다 전국 중3, 고2 학생의 3%를 표집해 국어, 영어, 수학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데, 국어 보통학력 이상인 고2 학생의 비율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전인 2019년 77.5%에서 코로나 1년 차인 2020년에 69.8%로, 2년 차인 지난해에 64.3%로 줄었다. 같은 기간 국어 보통학력 이상인 중3 비율 역시 82.9%에서 75.4%, 74.4%로 줄었다. 국어 수업을 못 따라가는 수준인 기초학력 미달 학생은 4%에서 7.1%(고2 기준)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최근 몇 년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 '불국어(국어 문제가 너무 어렵다는 뜻)' 논란이 반복되는 것이 청소년 문해력 저하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수능 국어 문제가 갈수록 어려워진다기보다, 요즘 수험생들의 문해력이 예전 수험생들보다 낮아 "해마다 강사들이 보는 문제 난도와 수험생들의 체감 난도 간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이만기 유웨이 평가연구소장)는 말이다.
불국어 논란이 시작된 건 2019학년도 수능부터. 이때 초고난도 문제 출제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2021학년도 수능에서도 대부분의 입시기관이 ‘예년만큼 평이했다’고 했지만, 채점 결과 전년도 수능보다 1등급 커트라인이 3점이나 떨어졌다. 지난해인 2022학년도 수능을 본 학생들은 국어 문제가 가장 어려웠다며 '용암 국어'라고 혀를 내둘렀지만, 당일 아침 입시기관들은 대부분 '평이하다', '조금 어렵다'는 분석을 내놨다.
'요즘 것들 문해력' 운운한 장년 세대 실력은...OECD 꼴찌
보다 객관적인 자료도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10여 년 치를 분석해 지난해 말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청소년들의 읽기 소양은 2006년 79개 참여국 가운데 1위에서 2009년 2~4위, 2015년 4~9위, 2018년 6~11위로 하락했다.
그러나 청소년 문해력을 중장년 세대와 비교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특히 세대별 문해력을 OECD 국가들과 비교하면 '중장년 세대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나' 싶을 정도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문해력은 10여 년 전보다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OECD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베이징 등 대도시 1~2위, 마카오 3~5위, 홍콩 3~7위)과 싱가포르(1~2위) 다음이고 오히려 미국(10~20위), 일본(11~20위)보다도 높다.
반면 중장년의 문해력은 OECD 꼴찌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3년 발표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서 16~24세 한국인 언어능력은 조사 대상 24개국 중 4위를 차지했지만, 35~44세 언어능력은 24개국 평균보다 낮았고, 45~54세는 하위권, 55~65세는 최하위권이었다. 당시 이 자료를 발표한 주OECD 대표부가 성별 학력별 언어, 수리, 문제해결 능력을 OECD 평균까지 비교해 가며 분석했지만, 세대별 언어능력은 16~24세를 제외하고 순위를 따로 내지 못한 채 두루뭉술하게 설명했을 정도다. 10년에 한 번 실시되는 PIAAC는 내년에 다시 발표된다.
연령별 교육격차가 큰 데다, 취업 후 재교육이 적은 사회 분위기가 중장년 세대의 'OECD 평균 이하 문해력'의 배경으로 꼽힌다. 한마디로 노년층에 문맹이 적지 않고, 중년은 공부를 안 한다는 말이다. 지난해 9월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국평원)이 발표한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수준1(초등 1~2학년 학습수준)’ 인구는 전체 성인의 4.5%, 200만1,428명으로 추산되는데, 80세 이상의 절반(49.3%) 70대의 13.7%가 이에 해당했다. 읽고 쓰지만 경제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만한, 중3 이하 언어능력(수준3)을 가진 사람은 20~30대의 4.7%에 불과했으나, 40대는 이보다 2배 많은 8.5%, 50대는 3배 이상인 17.2%, 60대는 7배 이상인 35.4%였다.
문해력이 문제? 오해의 시작은 어휘력
'심심한 사과' 논란에서 대다수가 간과한 점이 있다. 젊은 세대가 '심심하다'와 사흘, 금일과 무운의 뜻을 혼동한 건 문해력이 아니라 어휘력이 약한 탓이란 점이다. 글을 읽고 문맥을 파악하는 능력(문해력)까지 볼 것도 없이 단어 뜻만 정확하게 알았으면(어휘력) 없었을 해프닝이다. 애초 '네이밍'이 잘못되다 보니 일부 언론은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디지털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체계적으로 제공돼야 한다"고 말한 걸 두고 '심심한 사과 논란에 대통령도 나섰다'는 식으로도 보도했다. 디지털 문해력은 '디지털 기술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는 능력'으로 한국어 구사능력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풍부한 어휘력의 기준을 한자어에 둘 것이냐, 고유어에 둘 것이냐, 신조어에 둘 것이냐에 따라 '세대별 어휘력'은 또 달라질 수 있다.
'심심한 사과'에서 세간의 두 번째 반응(모르면 사전 찾아보면 될 일을 화부터 내더라)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왜 어려운 말 쓰냐"며 화낸 댓글은, 기성세대의 일방적 어휘 기준에 대한 반발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애들이 한자어 모르면 무식하다고 타박하면서, 당신들 신조어 모르는 건 왜 안 부끄러워 하냐'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이 1년에 선정하는 신조어가 400~500개에 달할 정도로 어휘는 빨리 변한다. 신조어 10개 중 7개는 10년 안에 소멸한다. 남길임 경북대 교수에 따르면 2005년~06년 사용됐던 신조어 938개 중 10년 뒤인 2015년까지 총 20회 이상, 연평균 1회 이상 매체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단어는 250개(26.6%)에 불과했다.
요컨대 세대별로 자주 쓰는 어휘의 간극을 좁힐 방안을 고민하는 게 '심심한 사과' 논란을 대처하는 생산적인 방법이다.
"요즘 작가들은 풀 이름, 나무 이름을 너무 모른다"는 고 박완서 작가의 생전 타박을 한참 듣던 후배 작가가 "우리가 식물 이름을 잘 모르는 건 사실이지만 대신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모카, 바닐라 라테처럼 기성 작가들이 나무 이름 아는 만큼 커피 이름을 안다"고 반박한 건 유명한 일화다. 박식의 기준은 세대마다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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