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모두 성취한 대한민국이 글로벌 문화강국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K컬처가 현지문화와 융합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현장을 지키는 해외문화홍보원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멕시코 부임 이후 매일매일 보람찬 날을 보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이 벅찼던 날을 꼽으라면 지난해 8월 15일, 광복절이다. 예스비 페치 리(Yesvi Pech Lee)와 마르타 후안뽀 게레로(Martha Juanpo Guerro)라는 멕시코 분들이 각각 이도경과 황보수아라는 한국 이름을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애니깽(Henequen·용설란)'으로 불리는 멕시코 정착 한인 노동자들의 후손이다. 100여 년 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일제강점기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광복을 염원했던 이들과 후손들은 분투의 삶을 살며 한인후손회를 조직했다. 한국인으로서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최근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닮은 김영하 작가의 소설 '검은 꽃'이 현지에서 번역 출간됐다.
5대까지 이어진 지금, 후손들 대부분은 달라진 외양에 다른 언어를 쓰며 미구엘, 마리아 등의 낯선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후손들은 선조들이 가지고 온 김, 이, 박, 송, 황보 등이 쓰여진 옛 서류들을 고이 간직하고 그 성을 따른 이름을 갖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런 개별적 소망은 큰 흐름이 되어 20대 젊은 세대부터 70대 할머니 등 다양한 연령대의 한인 후손들이 고·증조부모 이름이 쓰인 옛 서류를 갖고 한국문화원을 찾아왔다. 고·증조부모의 성씨와 본관, 항렬까지 고려한 제대로 된 한국 이름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지난해 멕시코 연방의회는 매년 5월 4일을 '한인 이민자의 날'로 제정하였고, 주멕시코 한국문화원은 이를 기념해 해외문화홍보원(KOCIS) 지원으로 한국 이름 작명 행사를 시작했다. 옛 서류에 대한 분석과 후손 개개인의 가족사를 모두 검토해 최적의 한국 이름을 짓는 작업이 시작됐다. 작명가를 통해 선조의 이름과 항렬, 돌림자, 직업, 생년월일 등을 고려한 이름이 지어졌고, 새 이름을 당사자에게 설명하는 절차도 거쳤다. 유카탄주 메리다시에 사는 한인 4세대 예스비 페치 리(Yesvi Pech Lee)는 '이춘도'와 '공기선'이라는 증조부와 증조모 성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 빛나는 삶을 살라'는 뜻의 '이도경'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국 성 '황보' 대신 비슷한 발음의 현지 성 '후안뽀(Juanpo)'를 쓰시던 70대 마르타 후안뽀 게레로(Martha Juanpo Guerro) 할머니는 '황보수아'라는 예쁜 이름을 얻었다. 독립유공자 '유순명'님의 손자 '프란시스코 유 리(Francisco Yoo Lee)'는 '유성민'이라는 이름으로 생전에 할아버님의 이름을 따를 수 있게 됐다고 감격해하셨다. 송씨 성을 가진 자매는 '앙헬리카'와 '미도리' 대신 새 한국 이름 '민지'와 '지은'을 서로 불러주며 즐거워했다. 케이팝(K-POP)과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젊은 한인 후손들은 '바다', '하늘' 등 순우리말 이름을 선택하고, 한국을 상징하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며 좋아했다.
뜻깊은 이름들을 전달하는 별도 행사도 광복절에 이뤄졌다. 선명장(選名狀) 전달식이었다. 선명장에는 한글과 스페인어로 새 우리말 이름에 대한 뜻풀이가 쓰여져 있다. 한글 이름이라는 작은 선물은 멕시코 한인 후손들에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더불어 큰 감동을 안겨줬다고 생각한다. 또 대한민국 공동체가 한인 후손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이기도 했다.
이 행사는 올해도 일정을 약간 변경해 진행 중이다. 광복절부터 후손들의 신청을 받고 있으며, 벌써 70여 명 후손들이 새 이름을 신청했다. 올해는 개천절 주간(10월 7일)에 선명장을 전달할 예정이다. 한인 후손들은 코리아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에 산재해 있다. 그곳이 어디건 한인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본인의 뿌리와 연결된 우리 이름을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한국 이름'이 선물로 돌아갔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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