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솔·GM 합작사 얼티엄셀즈 현지 르포]
GM 떠난 러스트벨트 도시에 첨단공장 복귀
미 정부 제조업 육성책을 노리고 입지 선정
양사의 강점 결합해 고객가치 극대화 목표
반도체법·인플레법으로 미 진출 '신의 한 수'
편집자주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연달아 국내 제조업 육성책을 내놓으며, 외국 기업에까지 ‘Made in USA’를 요구합니다. 미국의 ‘제조업 국가 복귀’ 선언은 글로벌 제조업 공급망을 어떻게 바꿀까요? 한국 기업들은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 지를 알아봅니다.
미국 이리 호(Lake Erie) 연안 오하이오주(州)의 작은 도시 워런(Warren). 클리블랜드와 피츠버그 사이에 자리 잡은 워런은 한때 철강산업으로 번성했지만, 여느 오대호 연안 도시들처럼 오프쇼어링(생산시설 해외 이전)과 글로벌 제조업 판도 변화(동아시아 제조업 성장) 탓에 쇠락했다. 1970년대 6만 명이 넘었던 인구는 최근 4만 명 아래로 추락했고, 지금 이 도시의 변변한 일자리는 병원 등 지역서비스와 소매업 정도가 전부다.
그렇게 서서히 활기를 잃어가던 도시는 요즘 제조업 부활의 기대감으로 들떠 있다. 한국 배터리 기업 LG에너지솔루션(LG엔솔)과 미국 최대 자동차 기업 제너럴모터스(GM)의 배터리셀 합작 법인 얼티엄셀즈(Ultium Cells) 공장이 이곳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미 시설은 다 지어졌고, 3분기 양산을 목표로 본격 생산을 기다리고 있다. 녹슬어 가던 러스트벨트(Rust belt·불황을 맞은 과거 제조업 중심지) 도시는 최첨단 산업인 자동차 배터리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러스트벨트에 들어선 첨단 공장
워런 공장은 2019년 출범한 얼티엄셀즈의 첫 번째 공장이다. 축구장 약 30개와 맞먹는 26만㎡ 넓이에 지어지는 워런 공장엔 총 2조7,000억 원이 투입됐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시제품 생산이 한창인 공장 인근에서 만난 은기 법인장은 "지금까지 약 800명의 현지 직원을 채용했고, 양산이 시작되면 500명 정도를 더 고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최대 고용주가 지역 병원이었던 워런에서, 얼티엄셀즈는 단숨에 가장 선망받는 직장으로 등극할 것으로 보인다.
얼티엄셀즈는 LG엔솔과 GM이 10년의 협력을 바탕으로 1대 1 출자 비율로 설립한 미국 법인이다. 얼티엄셀즈가 만드는 배터리셀은 모두 GM이 생산할 전기차에 들어간다. 얼티엄셀즈의 제2·제3 공장이 테네시주와 미시간주에 건설 중이고, 최근엔 네 번째 공장을 세우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얼티엄셀즈는 태생 자체가 오롯이 미국 시장을 겨냥한 합작법인이다.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북미 시장 공략에 사활을 건 LG엔솔, 독일·일본·한국에 밀렸던 자동차 종주국의 위상을 전기차 시대에 되찾겠다는 포부를 밝힌 GM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였다. 세계 2위 업체 LG엔솔의 배터리 기술, 생산량 세계 1위 자리를 최장기간(77년) 유지했던 GM의 인프라와 노하우를 결합해 고객 가치를 극대화하자는 의도가 통했다.
왜 하필 미국에 공장을 세웠나?
법인은 만들었지만, 공장을 어디 세우느냐가 문제였다. 남미나 동남아에서 배터리셀을 제조해 미국으로 들여오는 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었지만, 얼티엄셀즈가 굳이 인건비 높은 미국에 둥지를 튼 건 미 연방정부의 제조업 육성 전략에 올라타기 위해서다. 양사가 합작사를 만들기로 결정한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해외 투자를 지원하는 연방기관이 미국 내 제조업을 우선 지원하게 하는 행정명령(Buy America)을 내리는 등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기조를 강화하고 있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워런 일대에서 자동차 조립 공장을 운영하던 GM이 철수를 결정하자, 직접 이 지역을 찾아 "고향을 떠나지 마라, 공장은 다시 문을 열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하이오 지역민 입장에서 얼티엄셀즈 공장은 싼 인건비를 찾아 떠났던 생산기지가 다시 돌아오는 리쇼어링(제조업의 자국 회귀)의 상징인 셈이다.
미국의 산업정책 변화에 휘둘리는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기 위해, 얼티엄셀즈는 시작부터 미국 외에 다른 후보지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은 법인장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게 맞다"며 "인건비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국 시장 선점이란 목표를 위해선 극복해야 한다고 봤다"고 했다. 인건비는 자동화 등을 통해 해결할 문제지, 전략 방향 자체를 수정할 요소는 아니었다고 본 것이다.
호랑이굴로 들어간 승부수 통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겠다는 얼티엄셀즈의 승부수는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최근 미국에 생산시설을 둔 제조사에 세금을 깎아주고 인센티브를 주는 법안에 잇따라 서명했다. 미국 안에서 생산된 전기차로 보조금 지원 대상을 한정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통과에 따라, GM 합작법인 얼티엄셀즈는 이 법의 수혜를 고스란히 받을 수 있게 됐다.
한국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는 바이든 행정부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 독트린에 발맞춰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미 비영리 로비단체 리쇼어링이니셔티브에 따르면, 한국 기업의 투자로 새로 창출되는 미국 내 일자리는 올해 3만5,400개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국 정부의 제조업 지원 약속만 믿고 무작정 미국으로 진출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만하다. 은 법인장은 미국 투자를 검토 중인 기업들이 각 주 정부가 경쟁적으로 내미는 혜택에 현혹되지 말고, 회사가 세운 전략에 지역 특성이 부합하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제 혜택은 장기적으로 계산해 보면 주별로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기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지, 숙련된 인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지, 제조사 공장과의 거리는 가까운지 등의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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