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구분 가르지르는 젠더리스룩에 빠진 MZ세대
성별 고정관념 넘어 개성과 실용 중요시하는 흐름
남녀 아우르는 '유니섹스'와 차이...'나다움' 강조
차별적인 패션 관행 깨지면서 '좋은 패션' 성찰도
#. 1996년생 박지현(26)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이미지는 슈트 패션으로 수렴된다. 그는 Z세대(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출생) 정치 루키로 등장한 이래 공식석상에선 예외 없이 정장 슈트를 입었다. 당시 입었던 정장은 품이 넓고 라인이 들어가지 않은 중성적 스타일로 단색 넥타이를 매치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패션에 대해 "여성 슈트는 활동하기 불편해서 남성 정장을 입는다"며 "남녀의 틀을 깨는 젠더리스 스타일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 직장인 김세희(28)씨의 옷장 서랍엔 드로어즈가 가득하다. 드로어즈는 몸에 달라붙는 짧은 반바지 형태의 사각팬티를 말한다. 여성인 김씨가 흔히 '남자 팬티'로 불리는 드로어즈 팬티를 입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그는 "코로나19로 재택 근무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압박감 없는 속옷을 찾기 시작했다"며 "드로어즈는 집에서 반바지처럼 입을 수 있고, 밖에서도 편하게 입을 수 있어 신세계다"며 만족해했다.
성별 구분을 가로지르는 일명 '젠더리스(Genderless) 패션'이 MZ세대(밀레니얼세대+Z세대) 사이에서 확고한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입는 패션이 존재했지만 '젠더리스 패션'은 여성의 레이스나 벨벳, 진주 액세서리, 남성의 넥타이나 슈트처럼 남성 혹은 여성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패션 아이템을 남녀가 모두 착용하는 것으로 성별 경계가 허물어진 게 특징이다. 집단보다 개성을 중시하고, 소비에서 실용성을 추구하려는 젊은 세대의 문화가 일상 패션에도 전파되면서 남성복과 여성복의 전통적인 분류법이 급속히 퇴조하는 경향과 맞물렸다.
세상에 없던 패션으로 드러내는 '개성'
젠더리스 패션의 최대 매력은 개성을 맘껏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남성인 대학생 박진석(24)씨는 직접 구매한 진주 목걸이가 여럿 있다. 얇은 진주 목걸이부터 비즈가 조합된 목걸이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캐주얼한 패션을 즐겨 입는다는 박씨는 주로 티셔츠나 맨투맨에 목걸이를 매치한다. 원래 진주는 클래식한 여성 스타일의 고전으로 통해 남성들이 쉽게 택하는 보석은 아니다. 박씨는 "기존의 공식이 뭐였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며 "스타일에 크게 변화를 주기보단 작은 아이템으로 포인트를 주는 걸 즐기는데 진주 목걸이는 과하지 않으면서도 키치한 느낌을 줄 수 있어 자주 활용한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성이 진주 목걸이를 연출하는 모습은 패션 모델이나 연예인 사이에서만 볼 수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진주 목걸이 스타일링을 선보인 지드래곤을 포함해 그룹 방탄소년단의 멤버 뷔, 위너의 멤버 가수 송민호도 여러 가지 길이와 굵기의 진주 목걸이를 레이어링한 패션을 연출했다. 하지만 이제는 학교나 일터 등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됐다.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진주 목걸이를 한 자신의 사진에 '남성 진주 목걸이' 등의 해시태그(#)를 달아 올리는 남성이 적지 않다.
20여 년 동안 주얼리 업계에서 MD(상품기획자)로 일해온 팽수정씨는 "최근 1~2년 사이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중저가 보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패션 감각을 드러내려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이런 추세를 반영해 남성과 여성 모두 선택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제품군을 늘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그가 운영하는 주얼리 쇼핑몰 '비아디자인'은 기존에는 여성 고객이 전부였지만 최근 1년 사이 3~4만 원대 진주 액세서리를 구매하는 20대 남성이 대거 유입되면서 남성 고객의 비율이 전체 20% 수준으로 늘었다.
유니섹스에서 한걸음 더...'나다움'에 방점
젠더리스 패션을 1990년대 'X세대(1970년대생)' 사이에서 유행했던 '유니섹스(Unisex)' 패션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과거의 유니섹스 패션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소거해 남녀가 겸용할 수 있게 한 반면, 젠더리스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으로 인식되던 특징을 살리되 남녀 구분을 지우고 '개성'이나 '양성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니섹스 패션은 남성과 여성 모두 입을 수 있도록 사이즈 폭을 확대하고 디자인은 주로 오버 핏과 와이드 패턴을 적용한다. 아이템은 주로 성 고정관념이 없는 청바지와 후드 티셔츠에 국한됐다. 반면 젠더리스 패션은 남자 옷과 여자 옷을 구분 짓지 않고 신체적 특징, 취향의 차이만 고려하기 때문에 선택지가 훨씬 다양해졌다. 박소현 경희대 의류디자인학과 겸임교수는 "모든 성별에 어울린다는 의미가 담긴 유니섹스에서 한 차원 확장된 것이 젠더리스"라며 "기존 패션 법칙에 상관없이 자신의 확고한 취향에 따라 선택한다는 데 방점을 두고 있어서 앞으로 더욱 독특하고 과감한 방식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젠더리스 패션은 이미 연예인이나 패션 피플을 넘어 빠르게 일상 패션으로 스며들었다. 국내 패션 업계에 따르면, 최근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던 여성 브랜드들은 남성들이 입을 법한 오버사이즈 재킷과 코트, 통이 넓어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바지, 하이힐 대신 스니커즈를 주력 상품으로 밀고 있다. 매니시하고 강한 느낌을 강조하던 남성 브랜드들도 여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꽃무늬, 파스텔 컬러, 러플과 리본 등의 디테일을 가미한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나'에 주목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젠더리스 패션이 트렌드가 아닌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며 "소비자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에 패션, 뷰티업계에서 성 구분을 없엔 다양한 제품들이 잇따라 출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별 문법 파괴'... 패션의 본질에 주목하다
젠더리스 패션을 옹호하는 이들은 "성별 고정관념을 깨면 패션의 본질이 보인다"고 강조한다. 젠더리스의 부상과 함께 기존 여성복과 남성복의 관행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패션 업계는 '좋은 패션'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남성복 디자인을 더 화려하고 다양하게 할 순 없을까', '여성복을 더 편안하고 실용적으로 만들 순 없을까' 같은 질문들이다.
젠더리스 패션을 표방한 브랜드 'ACBF'를 론칭한 김수정 대표도 그런 경우다. 김 대표는 "성별 틀을 깨고 보니 원단부터 가공법, 봉제법, 사이즈에 이르기까지 여성복에 존재하는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필요했지만 아무도 만들지 않았던 여성 슈트와 넥타이, 드로어즈 등 젠더리스 패션을 통해 기존 관행을 넘어서려고 했다"고 말했다.
실제 ACBF가 제작한 슈트는 '예뻐 보이면 그만'이라는 기존 여성복의 문법을 탈피하고 철저하게 '실용성'과 '편안함'이라는 남성복 문법을 따른다. 일단 질 좋은 원단을 사용하고, 몸을 옥죄지 않도록 패턴에 여유분을 두거나 허리에 밴딩을 넣어 활동성을 높인다. 또 옷 변형이 적은 '쌈솔' 방식으로 재봉하고 바지나 재킷에 주머니도 많이 넣어 실용성을 극대화했다. 김 대표는 "기존의 남성복을 여성이 착용했을 경우 묘하게 어색했던 점들을 개선해 출시했는데 여성 드로어즈는 하루 만에 완판 대란을 이뤘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며 "예쁜 것도 중요하지만 편안함과 실용성 등 기본에 충실한 옷에 대한 여성들의 니즈가 그만큼 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젠더리스 패션 확산이 공고한 성별 관행을 깨고 패션의 본질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박소현 교수는 "젠더리스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패션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됐다"며 "진부함과 규칙을 거부하는 MZ세대가 젠더리스 패션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면서 패션계에 존재했던 차별적 관행들도 서서히 깨지는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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