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시지프 신화'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1940년 11월, 스물일곱 살의 한 프랑스 청년이 리옹의 허름한 숙소에서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17년 뒤 그는 44세의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가 되고, 또 몇 년 뒤엔 47세의 이른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될 운명이다. 청년은 결혼도 하고 싶고, 자살도 하고 싶고, 잡지구독 신청도 하고 싶다는 모순적 감정에 시달리며 늘 절망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오늘은 몹시 기쁘다. 오랫동안 구상해온 에세이의 초고를 막 완성했기 때문이다. “책에는 멋진 띠지를 둘러 달라고 출판사에 요청해야지. ‘시지프 혹은 지옥에서의 행복’이라고 새겨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이는 바로 책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을 통해 실존주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알베르 카뮈(1913-1960)다.
‘시지프 신화’는 삶의 부조리에 대해 분석한 철학 에세이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는 신들의 미움을 받아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에 처해졌다. 바위가 제 무게로 계속 굴러떨어지기에 그는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 했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신들이 그에게 이런 벌을 내린 것이다. 어차피 떨어질 것을 다시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신화는 결국 죽을 운명인데도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 자체가 부조리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조리하다고 해서 다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시지프는 아무 생각 없이 반복되는 일을 해나갈 수도 있다. 자기 상황을 제대로 자각하지 않으면 비극이랄 게 없다. 비극은 오로지 그의 의식이 깨어있을 때 시작된다. 다시 저 아래의 바위를 향해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시지프는 자신의 비참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반항적인 태도로 그 고통을 응시함으로써 비극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데 카뮈에 따르면, 비극은 피해야 할 게 아니라 자각하고 응수해야 할 운명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카뮈는 무언가 시도할 때 ‘성공할 거라는 희망’의 환상을 제거하라고 말한다. 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질 것이 확실한 순간에도 돌을 밀어 올려라. 인간의 행위가 사회·역사적 조건에 의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경험한 이들에게 이런 주장은 무모해 보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실패해도 계속 시도하라는 식의 철학은 얼마나 가혹한가? 그러나 실존주의는 “미래에 대하여 기대를 걸 것 없는” 부조리의 세계(옮긴이의 해설) 속에서 희망 없는 자들 옆을 지키려면 미래를 계산하는 영리함 대신 실패를 감수하는 사랑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유대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의 박해를 피해 파리로 왔을 무렵 파리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실존주의에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이 프랑스인 동료들은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저항의 승률은 제로라며 유대인 학자들을 외면한 독일인 동료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반유대주의를 거부했고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그녀는 “근대사회에 대한 지식인들의 온순함이 전쟁 중 유럽에서 나타난 가장 슬픈 광경들 중 하나”였으나 프랑스 실존주의가 지식인들의 진정한 반란을 가능케 했다고 보았다.
‘시지프 신화’는 파리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카뮈가 전쟁통에 피란지에서 쓰고 완성한 책이다. 미리 원고를 본 동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나, 정작 출판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나치의 파리 점령으로 종이가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책을 탈고한 뒤 시지프의 용기를 발휘해 제일 먼저 한 일은 항독 지하운동이었다. 또한 카뮈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다 34세에 결핵과 영양실조로 죽은 여성 철학자 시몬 베유의 미발표 작품을 출판하는 일에 열성적이었다. 그에게는 시몬 베유가 시지프였다.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싸우든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어렵다. 조금 전진한 기분이었는데 도로 제자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일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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