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연설문에 초심 생생히 담겨
당선 뒤 간절함과 국민 외경심 사라져
추석 후 겸손하고 진솔한 자세 갖기를
윤석열 대통령에게 이번 추석 연휴는 꽤 의미 있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간의 부진에서 벗어나 심기일전할 수 있는 계기로 삼겠다는 뜻을 대통령실에서도 여러 번 밝혔다. 법원의 추가 판단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새 비대위가 출범했고, 대통령실 인적 개편도 마무리 단계다. 용산의 기대대로 ‘윤석열식 정치’가 본격화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건 윤석열 정치의 실체다. 윤석열 자신이 정치에 뛰어들면서 보여주고자 했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 실마리를 윤 대통령의 지난해 11월 국민의힘 대선 후보 수락 연설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 행한 6번의 비중 있는 연설 가운데 초심이 가장 잘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락 연설문에서 당시 윤 후보가 가장 강조한 것은 ‘공정과 상식’이었다. “공정과 상식의 회복을 바라는 민심이 정치 신인인 저를 후보로 선택했다”고 정확히 짚었다. 공정을 13차례, 상식을 9차례 언급하며 자신의 브랜드임을 확실히 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4개월 만에 그 브랜드는 빛이 바랬다. 이제 어느 연설에서도 두 단어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윤 대통령 스스로 언급하기도 민망한 상황을 만든 데 있다. 조각 과정에서의 ‘서오남’ 논란을 시작으로 잇단 장관 낙마 사태, ‘사적 채용’ 파문 등에서 윤석열표 공정의 가치는 실종됐다. 김건희 여사와 관련돼 의혹이 꼬리를 무는데도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공정과 상식을 떠올릴 국민은 없다. 대통령이 내세운 브랜드를 초라하고 공허하게 만든 건 자신 아닌가.
수락 연설문에는 눈이 번쩍 뜨이는 발언도 있다. “당의 변화와 혁신을 바라는 민심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30대 청년을 당대표로 세워주셨다”는 대목이다. “우리 당은 청년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거듭났다”고도 했다. 불과 열 달 만에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당대표는 쫓아내지 못해 안달하는 ‘미운 오리새끼’가 됐다. “100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대표”에서 불구대천의 사이로 갈라선 배경엔 ‘내부 총질’ 문자밖엔 기억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갈라치기’에 대한 염증이 윤 대통령 당선의 자양분이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민통합은 그래서 가장 절실한 과제였다. 윤 대통령이 연설문에서 “진보의 대한민국, 보수의 대한민국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이념, 지역, 계층, 성별, 세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화답할 때 안정적 국가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통합을 강조한 것은 이런 이유다. 하지만 약속은 공염불이 된 듯하다.
윤 대통령은 여당 의원들을 수시로 용산으로 불러 식사하고 전화 통화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야당 의원과 만났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윤석열 정부의 핵심 정책과 법안 성사는 다수 야당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법을 우회하기 위한 시행령만으로 국정을 운영하기에는 애초 한계가 분명하다.
윤 후보 수락 연설문에는 정치에 갓 발을 내디딘 초보자로서의 간절함과 두려움이 묻어난다. 왜 정치를 하려 하는지, 대통령이 되면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기대와 포부도 담겨 있다. 윤석열의 날것 그대로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대다수 국민이 윤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이유는 그가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막상 당선이 되고 난 뒤 국민과 국가에 대한 외경심은 사라지고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이 들어섰다. “너무 쉽게 대통령 자리에 올라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너무 빨리 권력에 취한 게 아닌가 싶다.
윤 후보는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저에 대한 지지와 성원이 언제든지 비판과 분노로 바뀔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로 임하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작년 11월 5일 백범기념관에서 밝힌 대선 후보 수락 연설문을 다시 꺼내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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