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우리고장 특산물 : 울산 '서생 배'
간절곶 해풍 맞고 자라 당도 높고 식감 일품
품종 개량으로 경쟁력 확보… '황금실록' 인기
감기, 기관지 질환에 특효… 육류와 찰떡궁합
"배는 크고, 둥근 모양이 좋다는 인식 버려야"
국내 굴지의 조선소가 몰려 있어 '배의 도시'로 유명한 울산에선 "잘 만든 배에 배를 실어 수출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선박 건조 기술 못지않게 특산물인 배맛도 뛰어나다는 의미에서 나온 얘기다. 울산에서도 특히 간절곶이 인접한 서생지역에서 재배되는 배는 배 품목 가운데 지리적표시제 1호로 등록됐을 만큼 맛과 품질이 으뜸으로 꼽힌다.
천혜의 환경 '간절곶'이 빚은 명품 서생배
추석 연휴 직후인 지난 13일 오후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위곡마을을 찾았다. 제법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마을 전답에는 배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납작 엎드린 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황금색 배는 풍요로운 가을을 상징하는 듯했다. 서생면 일대에서 생산되는 배는 지난해 기준 7,900톤으로 전국 생산량(21만 톤)의 4% 정도에 불과하지만, 맛과 유명세는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울산 특산물로 서생 배가 기록돼 있다. 1900년 일본에서 건너온 농학박사 구라가다('창방'으로 불림)는 사질양토와 마사토에 적당한 햇볕과 큰 일교차, 나무에 미네랄을 공급해주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주목했다. 서생 지역을 배 재배의 최적지로 선택하고 일본산 배를 들여온 이유다.
50년째 배 농사를 짓고 있는 최병옥(68) 울산배수출공선회장은 “서생 배는 바닷바람이 올라가는 길목에서 자라서 식감은 아삭하고, 당도는 높은 게 특징”이라며 “해외에서도 그 맛을 인정받아 1998년부터 미국과 대만, 베트남 등으로 꾸준히 수출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품종 개량으로 시장 다변화… '황금실록' 인기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배는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 '신고' 품종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처음 도입된 후 1980년대부터 본격 보급되기 시작해 현재는 국내 배 생산량의 80%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한다. 신고는 어린 아이 머리통 만한 크기에 단단하면서도 당도가 뛰어나다. 보통 9월 말에서 10월 중순 사이 수확하는데, 올해처럼 추석이 이른 해에는 차례상에 올리기 어렵다.
최 회장은 “올해처럼 추석이 빠르면 신고배는 미숙과를 유통할 수밖에 없다”면서 “소비하기엔 너무 커서 잘 팔리지 않는 데다, 9월에 주로 발생하는 태풍 영향까지 고려하면 위험부담이 큰 품종”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조생종인 '황금'이다. ‘신고’와 ‘이십세기’ 품종을 교배해 육성한 것으로 2015년 울산농업기술센터가 농가와 의기투합해 ‘황금실록’ 브랜드로 시장에 내놨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작고 맛있는 배’로 알려지면서 지난해까지 7년 연속 완판을 기록했다. 식감도 부드러워 사과처럼 들고 베어 먹기에 그만이다. 최 회장은 “황금의 당도는 보통 12브릭스 이상으로 최고 수준"이라며 “제수용이 아닌 일반 소비용으로 훨씬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는 '황금'에 서양배인 '바틀렛'을 교배한 '그린시스'도 시범 육성 중이다. 울산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신고배의 검은별무늬병 감염률은 69.4%에 달하지만, 그린시스는 3.3%에 불과하고 상온 저장기간도 30일 정도로 길어 수출 유망 품종으로 키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크기보다 맛 "큰 게 좋다는 인식 사라져야"
배는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다. 인공수분과 적과, 봉지 씌우기, 수확 등 어느 것 하나 기계로 대신할 수 있는 게 없다. 오전에 따온 배의 봉지를 벗겨 꼭지를 다듬은 뒤 선물용 상자에 담느라 분주하던 최 회장은 “배는 살짝만 긁혀도 상품성이 떨어진다”며 “최상의 품질을 위해 4만㎡(약 1만2,000평) 규모의 배 농사를 지으면서도 가능하면 다른 사람 손은 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날 작업 인력도 최 회장의 아내와 딸이 전부였다.
배 재배 농민들은 하나같이 “배는 무조건 크고 동글동글하고 연한 갈색이 좋다는 인식부터 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왜 그럴까. 달고 맛있어도 울퉁불퉁하거나 작아서, 또는 색깔이 낯설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외면당하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귤은 큰 게 싼 편인데, 배는 무조건 클수록 비싸진다"며 “고정관념만 버리면 소비자들은 얼마든지 더 맛있는 배를 먹을 수 있고, 생산자들은 일손을 덜면서 수익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몸에 이로운 배, 버릴 게 없다
배를 뜻하는 한자인 이(梨)는 몸에 이롭다는 뜻에서 생겨났다. 배는 비타민 B, C와 섬유소가 풍부해 감기와 기관지 질환 치료에 도움을 준다. 배변과 이뇨작용을 돕는 동시에 알코올을 분해하는 아스파라긴산이 함유돼 있어 숙취 해소에도 좋다. 배를 먹을 때 오돌토돌 씹히는 작은 알갱이 석세포와 단맛을 내는 소르비톨은 구강을 청결하게 한다. 특히 과일 중 유일하게 배 껍질에만 들어 있는 알부틴은 미백 효과가 뛰어나 화장품의 기능성 원료로도 주목받고 있다.
배는 대표적인 알칼리성 식품인 쇠고기 등 육류와 찰떡궁합이다. 냉면과 육회 등 각종 요리에 곁들이거나 채소와 함께 무침으로 즐겨도 좋다. 배즙, 배빵, 배잼, 영양갱 등 다양한 가공식품도 별미다. 이순걸 울주군수는 ”울산배를 활용한 고부가가치 상품 개발로 소비를 촉진하고, 지역 특산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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