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변호사 3만명 시대라지만 수임료 때문에 억울한 시민의 ‘나홀로 소송’이 전체 민사사건의 70%다. 11년 로펌 경험을 쉽게 풀어내 일반 시민이 편하게 법원 문턱을 넘는 방법과 약자를 향한 법의 따뜻한 측면을 소개한다.
갑돌씨는 A가구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영세 업체 사장이다. A회사와 납품계약서를 쓰지 않고 신뢰관계로 거래해왔다. 그런데 A회사가 돌연 주문했던 부품 1,000만 원어치의 수령을 거절했다. 갑돌씨는 A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수백만 원의 변호사비가 아까워 홀로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변론기일이 열렸고, A사에서는 변호사가 출석했다. 변호사는 “A사는 납품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없습니다. 갑돌씨는 계약서도 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갑돌씨 눈에 불이 켜졌다. “판사님, 그전부터 납품했고, A사가 주문을 안했다면 부품을 1,000만 원어치나 만들어 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갑돌씨 호소에도 A사 변호사는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곰곰이 생각하던 판사가 갑돌씨에게 물었다. “계약서가 없어도 A사와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은 내용은 있지 않나요?” 갑돌씨는 불현듯 떠올랐다는 듯 “A사 영업부장, 황 부장과 주고받은 문자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판사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러면 문자내역을 제출해보세요”라고 독려하며 다음 기일을 잡았다. 며칠 후 갑돌씨는 해당 문자메시지와 통화녹음까지 모조리 찾아 제출했는데, 1,000만 원 상당의 납품계약 체결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었다. 구두계약에도 법적 효력이 인정되므로 갑돌씨는 무난히 승소했다.
민사소송법에 따르면, 판사는 당사자의 주장⋅진술이 불명확하거나, 필요한 입증을 다하지 못한 경우 소송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필요한 질문을 할 수 있고, 입증을 촉구할 수 있다. 이를 ‘석명권 행사’라고 한다(민사소송법 제136조 제1항). 위 사례에서도 판사는 갑돌씨에게 석명권을 행사한 것이다. 판사가 그러지 않고, 갑돌씨에게 ‘그래서 더 할 것이 있나요?’라고 간단히 묻고, 재판을 끝냈다면 갑돌씨는 입증 부족으로 패소했을 것이다.
대법원은 ‘당사자가 무지, 부주의나 오해로 인하여 입증을 하지 않는 경우, 더욱이 법률전문가가 아닌 당사자 본인이 소송을 수행하는 경우라면, 판사는 입증책임의 원칙에만 따라 입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판결할 것이 아니라, 입증을 촉구하는 등의 방법으로 석명권을 적절히 행사하여 진실을 밝혀 구체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판시하였다(대법원 1989. 7. 25.선고 89다카4045판결 등 다수).
이는, 마땅히 승소해야 할 당사자가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서 소송기술의 부족으로 패소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원 차원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갑돌씨와 비슷한 사례를 민사 법정에서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다.
변호사 3만 명 시대라지만, 비싼 수임료 때문에 변호사 없이 ‘나홀로 소송’을 하는 사건이 전체 민사소송의 70%라고 한다. 만약 갑돌씨처럼 나홀로 소송을 하고 있다면 변론기일에서 판사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열심히 따라갈 것을 권한다. 혹시 판사가 나에게 불리한 말을 했더라도, 그것은 ‘이 부분을 보충하라’고 힌트를 주는 것이다. 판사가 편파적이라고 불만을 갖기보다는 지적받은 부분을 열심히 보충해야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이 커진다.
다만, 두 가지만 주의하자. 첫째, 판사도 사람이다. 이미 설명했던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게 한다거나, 소송의 쟁점과 관계없는 막무가내 얘기로 판사의 시간을 뺏는다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둘째, ‘변론주의’ 원칙이다. 판사는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새로운 관점을 시사하거나 구체적 증거방법까지 알려줄 수는 없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 판사가 “돌아가셔서 법률전문가와 상의하라"고 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변호사와 상의해야 한다.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내용을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이나 각 지방변호사회에서 무료법률상담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니 연락해 상담을 받아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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