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에게 큰 기회였던 순방
조문 불발과 부족한 기조연설로 아쉬워
외교능력 지적당하는 일 다시 없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정치경력이 짧은 대통령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취임 초기 운이 좋았던 편이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대통령실 입성 후 5개월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세계 무대에서 윤 대통령 본인은 물론 새 정부의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가 연거푸 펼쳐졌기 때문이다.
6월 말 우리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나토 정상회의에 초청받은 윤 대통령은 신냉전의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선 채 그럭저럭 잘 운신하면서 동맹강화와 방산외교의 성과를 따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이러한 윤 대통령의 첫 순방외교에 80점, 김건희 여사에게도 90점을 줬을 정도다. 중국 리스크를 키웠다는 지적을 무시할 수 없지만, 폴란드에 이어 최근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잇따른 방산협력 러브콜을 끌어낸 공은 작지 않다.
윤 대통령의 두 번째 운은 공교롭게도 영국 여왕의 갑작스러운 서거(현지시간 8일) 소식과 함께 다가왔다. 전 세계 정상급 인사 가운데 최고령으로 전후 국제질서 형성의 중심에 서 있던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조문외교의 기회가 열리면서다. 100년에 한 번 만들어질까 말까 한 초대형 외교무대가 윤 대통령의 첫 유엔 연설에 앞서 펼쳐졌다. 정상급 인사와 왕족 500여 명이 모여든 세기의 장례식은 여러모로 최적의 사교 현장이 됐다. 이곳에서 얼굴을 익히고 한두 마디 말을 섞은 정상을 곧바로 뉴욕에서 만나는 시나리오. 이는 '외교 초보' 윤 대통령의 위상을 단박에 끌어올리는 기회였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여왕 조문과 유엔 연설의 동선은 윤 대통령에겐 천재일우였던 셈이다. 존 F. 케네디, 오부치 게이조, 리콴유를 각각 조문했던 박정희, 김대중, 박근혜 전 대통령이 누렸던 '찬스'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왕 별세 소식이 유엔 총회 스케줄 확정 후 전해지고, 주영 대사가 공석인 가운데 추석 연휴까지 겹치면서 대통령실과 외교당국의 손발이 원활히 맞지 않아서였을까. 알 수 없는 이유로 늦어진 스케줄 탓에 조문외교의 주 목적인 조문이 불발했고, 야당의 주장에 따르면 런던 체류 동안 공식 일정 2시간 외 대통령 부부의 '업무'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동아시아국 정상 가운데 유일(일본은 일왕 부부가 조문)한 조문객 윤 대통령이 훨씬 더 부각될 기회들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건 분명하다.
여왕 장례식(19일) 후 자로 잰 듯 연결된 유엔 총회(20일)와 이어진 한일, 한미 정상회담에는 마찬가지로 윤 대통령이 놓치지 않았어야 할 외교의 금맥이 가득했다. 국제사회의 컨센서스로 자리한 러시아의 침략전쟁 성토, 담대한 구상 등 대북 메시지를 기조연설에 담았다면 "다시 봐서 반갑다"고 한(여왕 장례식에서 만남 후 20일 뉴욕에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와 더 깊은 대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어쩌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48초보다 훨씬 길게 윤 대통령을 붙잡아 놓고 양국 관계의 골칫거리가 된 인플레감축법 갈등 해소의 단초를 내밀었을 수도 있었겠다.
잘 차려진 밥상을 그대로 물린 셈이랄까. 여러모로 아쉬웠던 윤 대통령의 해외순방이었다. 여기에 더해 비속어 실언과 한일 정상회담 성사 과정의 불쾌함까지 따져보자면 그 정도는 단지 '주어진 기회를 놓쳤다'의 수준에 머물 수는 없겠다. 2019년 3월 추경호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한 강경화 외교장관을 질타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번은 실수, 여러 번이면 실력입니다." 강경화 장관의 외교부는 한·말레이시아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어로 인사말을 하도록 한 책임을 추궁당하던 중이었다. 윤 대통령의 다음 해외순방 후 혹시나 이런 말이 나올 일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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