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회에서 가결된 '장관 해임건의안' 6건
"장관은 상징적 희생양...정권 심판 성격 강해"
대통령 거부 가능, '식물장관'·'정국대치' 불가피
더불어민주당이 박진 외교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다. '빈손 외교', '비속어 파문' 등 각종 논란으로 점철된 윤석열 대통령의 해외 순방과 관련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윤 대통령이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인적 교체에 선을 그은 상황에서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상징성이 큰 외교 수장이 대표로 매를 맞아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게 민주당의 논리다. 정치적 책임을 묻겠다는 거다.
헌법 제63조 1항에는 '국회는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해임건의안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발의를 하고 재적의원 과반수(150명) 찬성으로 의결된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 요건과 동일하다. 민주당 의석수(169석)만 따져도 통과는 무난해 보인다.
장관 한 명 날리는 게 목적 아냐... 정권 심판·견제용 '다목적 카드'
문제는 해임건의안에 강제성이 없다는 점이다.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련해놨지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1987년 개헌 이전엔 국회에서 해임안이 통과되면 장관은 자동으로 물러나는 '강제 해임' 규정이 있었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제헌 국회 이후 제출된 장관 해임건의안(불신임결의안 포함)은 160여 건에 달한다. 하지만 이 중 국회에서 가결된 건 단 6건. 나머지는 부결되거나, 철회됐다.
그렇다면 해임안이 가결된 6명 장관의 거취는 어떻게 정리됐을까.
결론적으로 5명은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고, 단 1명만 장관직을 유지했다.
"국회 힘 보이자"... 독재정권에서 이탈표, '항명' 파동으로
최초로 해임안이 가결된 건 1955년, 이승만 정부 때였다. 쌀값 폭등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 임철호 농림부 장관에 대한 해임안이 발의됐다.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이 의석 과반을 차지했지만, 이탈표가 생기면서 가결됐다.
엄혹한 독재정권이었던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해임건의안으로 두 명의 장관이 직을 잃었다.
1969년 권오병 문교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통과는 '4·8 항명'으로 불릴 만큼 박정희정권에 대한 반기를 든 성격이 짙었다. 당시 권 장관을 잘라야 한다는 표면적 명분은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에 대한 민심의 반발을 수습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국회에서 권 장관이 보인 폭언과 거만한 태도도 도마에 올랐다. 권 장관이 의총에 나와 90도로 허리 굽혀 사과했지만 의원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공화당 안에서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하기 위한 세력은 권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대통령 견제 장치"로 보고 적극 지지했다.
'햇볕정책' 심판 성격...DJP 공동정부 와해되는 계기도
대통령 지시로 해임건의안 반대가 당론으로 정해졌지만 끝내 권 장관 해임안은 총 투표수 152표 중 가표 89표, 부표 57표, 무효 3표로 가결됐다. 투표에 참여한 공화당 의원이 모두 100명이었으니 최소한 40여 명이 당론을 어기고 신민당에 동조한 셈이었다. 대통령은 항명 파동 주동자를 색출해 의원 5명을 제명했다.
그럼에도 '항명'은 또 있었다. 1971년 이른바 실미도 특수군 난동사건의 책임을 묻기 위한 오치성 내무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도 여당의 집단 이탈표로 가결된 것. '10·2 항명' 당시 이탈표도 20표가 넘었다.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은 '중정(중앙정보부)'으로 잡혀가 고문과 취조를 당했고, 의원직을 잃기도 했다.
1987년 개헌 이후 국회에서 장관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건, 김대중·노무현·박근혜 정부에서 한 차례씩 있었다. 이때도 장관 개인의 실책보다는, 정권에 대한 타격을 주기 위한 카드로 해임건의안을 꺼내든 측면이 강했다.
노무현 정부 '중간평가'... "야당의 정략적 희생양" 반발도
2001년 김대중 정부 당시 한나라당은 북한 상선의 영해 침범을 문제 삼아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발의했다. 임 장관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책임자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김대중(DJ)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 제기였다. 임 장관이 사실상 '햇볕정책 지휘자' 역할을 한 만큼 이에 대한 '심판' 차원이었다.
임 장관의 해임건의안은 정국을 요동시키는 방아쇠도 됐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만으로는 의석수가 모자랐지만, 공동여당을 구성하고 있던 자민련에서 이탈표가 나오면서 가결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DJP공동정부의 와해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2003년 참여정부 시절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역시 노무현 정권 6개월 실정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짙었다. "노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김 장관이 상징적으로 선정됐다"(홍사덕 한나라당 사무총장)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며, 지방분권 균형발전 등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국정과제를 실행하는 김 장관은 야당이 노리는 가장 적절한 타깃이었다. "다수당의 횡포"라고 강하게 반발하던 노 대통령이었지만, 끝내 김 장관의 자진사퇴로 야당의 손을 들어줬다.
정국 주도권 경쟁 속 해임안 수용 거부... '식물 장관' 꼬리표
국회가 통과시킨 장관 해임건의안을 대통령이 거부한 사례는 박근혜 정부가 유일하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황제전세' 등 개인비리를 문제 삼아 해임건의안을 압도적 표결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단칼에 물리쳤다. 직무능력과 무관한 개인비리이고, 청문회에서 이미 대부분의 의혹이 해소됐다는 이유를 들어서다. 김 장관은 여권의 비호 속에 자리를 보전했지만, '식물장관'이라는 꼬리표를 떼지는 못했다.
사실 김재수 장관 해임건의안의 본질은 여소야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경쟁이었다. 정부여당은 거대 야당의 횡포에 밀릴 수 없다며 버텼고, 야권 역시 물러서지 않으면서 대치 국면이 한동안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장관 해임건의안은 장관 한 명을 날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장관을 넘어 정권에 대한 심판, 견제 차원의 노림수가 깔려 있는 다목적 카드인 셈이다.
구속력 없는 '권고사항' VS 국회 입법 행위 존중해야
따라서 대통령의 해임건의안 수용 여부를 놓고 여야는 처한 상황에 따라 180도 입장을 달리해왔다.
여당일 때는 '해임건의안 거부가 헌법에 위배되는 게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건의는 문자 그대로 권고일 뿐, 법적 구속력은 없다"는 취지다.
반면 야당일 때는 '민의의 전당인 국회 입법행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며 정당성을 강조한다. "강제성은 없지만, 국회 입법 행위를 존중해 대통령이 정치적 판단에 나서야 한다"는 거다.
민주당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막기 위해 벌써부터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다.
진성준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28일 "최악의 외교 대참사라고 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박진 외교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더 큰 국민적 비난을 받게 될 것"(MBC 라디오) 이라고 경고했다.
'윤석열의 결단'이 어디로 향할지, 윤 대통령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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