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서울 낙원동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나의 첫 직장은 낙원이었다. 불문과를 나온 대학 동기들이 외국계 기업에 취직해 강남으로, 테헤란로로 향할 때 나는 비교적 한산한 대화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종로3가역 환승통로에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는 노인들을 지나 출구 계단을 오르면 한약재 섞인 국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무실은 기원과 떡집, 고전의상실과 라이브카페 등이 늘어선 낙원동 한복판에 있었다. 낙원상가 근처 오래된 빌딩 안에 있는 조그만 잡지사였다. 건물주인 잡지사 대표는 “육이오(6·25 전쟁) 때도 살아남은 건물”이라며 갈라진 벽을 자랑스럽게 쓸어내렸다.
사무실은 6층이었는데 육이오 때 살아남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오를 때마다 옷에 가루가 묻어나고 분진이 일었다. 마지막 층계 참에 다다르면 묵직한 자물쇠를 채운 철창문이 나왔다. 감옥을 연상케 하는 검고 반들반들한 철창이었다. 자물쇠를 따고 반층 더 오르면 좁고 스산한 복도가 펼쳐졌다. 왼쪽 끝은 옥외 계단으로 통하는 비상구였고 오른쪽 끝이 감옥 아니, 사무실이었다. 오래된 건물이 주는 인상과 달리 사무실은 드라마에 나오는 잡지사처럼 근사했다. 안타깝게도 월간지 마감은 드라마가 아닌 ‘리얼’이어서 그 낙차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높은 연봉보다 예쁜 사무실이 더 중요했고, 강남과 테헤란로의 동기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그럴 나이였다.
그러나 세련된 사무실이 동네의 야생성을 완전히 차단해주지는 못했다. 낙원동에는 24시간 고성이 오갔다. 새벽 노동을 끝내고 막걸리를 마시다 시비가 붙은 인부들의 욕설이 아침부터 귀를 때렸다. 선거철에는 유세 차량의 확성기 소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칼바람 부는 겨울이면 오갈 데 없는 노숙자들이 추위를 피해 우리가 일하는 건물 안으로 숨어들었다. 야근 중에 과월호가 쌓인 복도를 지나다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노숙자에게 발이 걸려 넘어진 적도 있었다.
저녁이면 회사 앞 도로에 포장마차가 길게 늘어섰고 뒤편 익선동에는 고기 굽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대표는 퇴근할 때 반드시 빌딩 셔터를 내리라고 신신당부했다. 취객들이 자꾸만 안으로 들어와 건물 화장실을 더럽히고 간다는 얘기였다. 이런 사정으로 마감 때는 어쩔 수 없이 셔터를 내린 빌딩 안에서 일해야 했는데, 그렇듯 닫힌 공간에서 바깥의 와글와글한 소음을 감지하며 원고를 쓰고 있으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타자기를 두드리는 종군기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낙원동의 터프한 음식을 부담스러워하는 기자들이 많아 점심은 주로 이웃한 인사동에서 먹었다. 자주 가는 맛집들이 몰려 있는 쌈지길 근처에서 밥을 먹고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는 탑골공원까지 갔다가 먹자골목의 펄펄 끓는 수증기를 헤치고 다시 낙원상가 앞으로 돌아오는 그 길이 우리의 단골 산책로였다. 걷다 보면 거리를 오가는 이들이 청년에서 노년으로, 다시 중장년으로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연이은 야근으로 몸이 쇠약해지는 마감 기간에는 낙원동의 터프한 음식을 부러 찾기도 했다. 회사 앞에서 파는 뜨끈한 삼계탕 한 그릇도 그중 하나였다. 주문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은 작고하신 송해 선생님이 저쪽 어딘가에 앉아 계시곤 했다. 선생님의 생전 삶을 조명한 기사 중에 ‘송해가 뜨면 낙원동이 들썩거렸다’는 식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내가 아는 한 선생님은 거의 늘 낙원동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여느 방송인 같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삼계탕을 시키면 인삼주 한 잔이 서비스로 나왔는데 한 잔이 한 잔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가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월간지 발간이 예정보다 하루 미뤄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 낙원동은 게이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주말 저녁이면 회사 앞 포장마차촌은 게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탈바꿈했다. 마감 중에 마음이 갑갑할 때면 우리는 사무실을 빠져나와 그 왁자한 풍경 속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지금이야 포장마차 어디서든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허물 없이 어우러지는 분위기지만 그때는 사정이 달랐다. “오늘은 귀한 손님들 받는 날”이라며 주인 이모들로부터 문전박대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당시 남자친구는 대학 밴드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였다. 그는 프로 기타리스트였고 나는 아마추어 베이시스트였다. 시작부터 엇박자였던 그 선배와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머지않아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한 시절과 결별하듯, 갖고 있던 베이스기타도 함께 버렸다. 스무 살 때 낙원상가에서 얼결에 구입한 국산 베이스기타였다. 신입생인 내가 악기를 사겠다고 하자 “너 같은 초짜는 눈탱이 맞기 쉽다”며 너도나도 훈수를 놓던 동아리 선배들이 급기야 팔을 걷어붙이고 낙원상가까지 따라나섰다. “낙원상가 주인은 사실 한 명이며 이곳 점포들은 모두 한통속”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우리만 믿으라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던 그들은 막상 상가에 들어서자 하나같이 주눅이 들어서는, 악기상의 해박한 지식 앞에 꼼짝도 못하다가 내가 값비싼 베이스기타를 에누리 없이 구입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두 번째 직장은 삼성동이었다. 드디어 나도 도시의 커리어우먼처럼 살아 보나 했더니 웬걸, 그 잡지사는 사무실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지금은 사라진 ‘필름2.0’이라는 영화 주간지였다.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은 종로에 몰려 있었고 취재처 역시 그 부근일 때가 많았다. 경력 기자 중 막내였던 나는 고전영화에 대한 상식이 부족해 애를 먹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보며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향을 손쉽게 읽어 내는 선배들의 눈이 부러웠다. 뒤늦게나마 그런 눈을 기르고 싶어, 나는 다시금 대화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퇴근 후 지금은 정동길로 자리를 옮긴 낙원상가 4층 서울아트시네마로 달려가 클로드 샤브롤, 에른스트 루비치, 오즈 야스지로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허겁지겁 눈에 담았다. 한번은 피와 살이 난무하는 공포영화 세 편을 일곱 시간 동안 연달아 보기도 했다. 여름을 맞아 특별히 마련된 심야상영 프로그램이었는데, 동틀 무렵 극장 밖으로 나온 관객들이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다 같이 아침을 맞이하던 그 풍경 또한 내게는 잊을 수 없는 낙원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요즘처럼 바람이 선선한 계절이면 남편과 함께 밤 산책을 나간다. 안국역 사거리에서 운현궁과 낙원상가와 탑골공원을 잇는 삼일대로를 따라 걷다가 종묘로 발길을 틀어 조선시대 왕이 백성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돈화문로 방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을밤 낙원동 포차 거리의 흥청대는 매력을 모른 척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요즘 낙원동은 전과 달리 세대와 인종이 마구 혼재된 분위기라 운치가 뉴욕의 차이나타운 못지않다. 두 손을 꼭 잡은 젊은 남녀 커플도 있고, 각자 팔짱 끼고 걷는 남남 중년 커플도 있고, 혼자 왔다가 둘이 된 듯한 국제 커플도 있고, 우리처럼 이도 저도 아닌 중년 부부도 (드물지만) 있다. 이곳 포차들 중 몇몇은 작은 활어 수조를 갖추고 있어 횟집처럼 싱싱한 해물 안주를 낸다. 수조에서 막 건진 오징어와 새우를 과자처럼 바삭하게 튀긴 ‘오튀새튀반반’이 우리의 단골 안주다.
이렇듯 참새방앗간 같은 동네임에도 낙원동은 여전히 미스터리함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모르는 풍경과 사람이 여전히 흔하다. 미러볼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라이브 카페가 때로 나이 지긋한 문인들의 시낭송회 장소로도 쓰인다는 것, 이 동네 이발관에는 염색약 색깔이 까만색 한 가지이며 화장실에는 노인들을 위한 변기 일체형 세면대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 낙원상가의 수리 장인들이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은 악기를 손수 고쳐 필요한 사람들에게 매해 재기증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런저런 글과 전언으로 더듬어 알 뿐이다. 낙원동의 진짜 주인은 이따금 산책하듯 들르는 내가 아니라 은퇴 후 사회에서 밀려난 어르신들, 1970년대부터 이 거리를 지켜 온 성소수자들이다. 십여 년간 2,000원에 팔아 온 우거지해장국 가격을 500원 인상했다며 못내 미안해하는 국밥집 사장님과 탑골공원 인근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하는 시민들, 허름한 노포에 앉아 그 모든 이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기울였던 고(故) 송해 선생님이다.
오래전 신문 기사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이 거리의 주인들을 아슴아슴 그려 보기도 한다. 낙원상가에 전국 최대 규모의 악기종합상가가 만들어진 계기가 탑골공원 안에 군악대와 양악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낙원상가 6층부터 15층까지 이어지는 낙원아파트가 1960년대 건립 당시 오늘날 타워팰리스 같은 위상을 누렸으며, 상가 지하에 있는 재래시장이 부유층을 상대로 고급 물품을 거래하던 서울 최초의 지하 마트라는 것 또한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다. 그 시절에는 정말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었구나, 감탄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낙원동은 언제나 누군가의 낙원이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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